[영화]이인화가 본 '엽기녀' "유치함 뒤의 심오한 메세지"

  • 입력 2001년 8월 23일 18시 36분


국가, 계급, 전통적인 가족으로 이루어진 사회 질서가 급격하게 쇠락하는 이 뒤숭숭한 시대에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사는가.

“내 멋대로 산다”가 가장 확실한 정답처럼 보인다. 명령에 복종하거나 자신을 사회의 틀에 맞추거나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개인의 자기 만족만이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당위 명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생의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자기만의 작은 질서에 대한 동경은 더욱 강해진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아무런 깊이가 없는 이야기의 심오함’으로 이런 동경을 그려내었다.

영화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너무 유치하다. 영화가 아니라 길게 이어붙인 코믹 CF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관심과 욕망을 접고 작품 자체의 세계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CF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상을 수단으로 관객 자신의 욕망을 보여준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우리는 테크노 댄스를 추던 컬러복사기 CF의 여자 전지현과 문자메시지를 보며 울먹이던 휴대폰 CF의 남자 차태현을 다시 확인하면서 영화를 보지 않고 나도 저런 애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욕망을 본다. 이런 욕망은 즉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유치하다.

그러나 동시에 ‘엽기적인 그녀’는 재미있고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아주 겸손하게 연애의 세태만을 따라가는 감독의 시선이 모든 선험적인 메시지를 넘어 ‘내 멋대로 산다’는 청춘의 독특한 내면풍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 죽어!”를 입에 달고 살고, 남자 친구를 자주 때리며, 천방지축으로 장난치고, 툭하면 술에 취해 길거리에 뻗어버리는 여주인공은 ‘나대로 세대(Me generation)’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적응 인간(不適應人間)이다. 자기 삶을 항상 자기의 손안에 장악하려고 하는 ‘나대로 세대’에게는 사랑도 자신의 생활을 만들어 가는 경험의 한 요소일 뿐이다. 이 세대의 연애에는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이 서로의 운명에 너무 깊숙하게 연관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엽기적인 그녀’는 이런 자기 또래처럼 살아갈 수 없는 처녀이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며 능동적인 여성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전에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순정파이다. 그녀의 엽기 행각은 과거를 잊어보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대부분의 나대로 세대가 나와 너, 자기 방과 길거리의 구별이 분명한 분열증형 인간이라면 그녀는 특정한 타인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너무 커서 과도한 흥분과 과도한 우울을 갖게 된 조울증형 인간인 것이다.

우리는 온갖 구박을 감내하는 남자 주인공처럼 이 ‘엽기적인 그녀’를 한없이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엽기적인 그녀의 내면세계는 내처 배우고 느껴온 경험, 축적된 과거가 존재하는 이상한 세계이다. 그 기묘한 멜랑콜리는 말초적인 웃음과 함께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을 환기시키면서 눈물짓게 한다.

이인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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