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캐릭터열전]'K2'의 테일러

  • 입력 2001년 9월 13일 18시 47분


산악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 중에는 ‘버티컬 리미트’나 ‘클리프 행어’처럼 관객동원에 크게 성공한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의 산악인들은 이런 영화들에 대해 다소 뜨악한 감정을 품고 있다.

음모가 있고 악당이 등장하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테크닉을 선보여 등반행위를 과장하는 등 이른바 할리우드식 이야기 만들기가 너무 심해 실제 산악인과 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K2’는 드물게 찾아볼 수 있는 정통 산악영화다. 이 영화의 플롯은 극히 단순하다. 그저 산에 미친 인간들이 산에 오르는 것뿐이다. 이렇게 단순한 영화를 열 댓 번이나 보고 그때마다 감동을 느꼈다면 내가 너무 단순한 인간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최근에 산악영화를 준비하면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꼼꼼히 뜯어보니 그 안에는 캐릭터에 대한 깊은 탐구와 놀라운 변화가 숨어 있었다.

테일러(마이클 빈)는 출세가도를 내닫는 변호사다. 그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쟁취하고야 마는 ‘능력 있는’ 인간이다. 술집에서 만난 아가씨의 아파트를 빌더링(건물 외벽을 오르는 것)해서 들어가고, 편법과 협박을 써서라도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며, 등반 중 위급한 상황을 맞으면 믿을 건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지독한 이기주의자는 요컨대 자본주의적 경쟁체제의 승리자인 셈이다.

테일러의 유일한 친구이자 자일 파트너는 물리학자 해롤드(매트 크레이븐)다. 해롤드는 테일러에 비하면 얌전한 책상물림이다. 그는 테일러와는 다른 인생관을 갖고 있지만 그와 함께 자일을 묶고 K2에 오른다. 영화 ‘K2’는 시종일관 이 두 캐릭터의 우정과 갈등, 그리고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캐릭터의 눈물 어린 격돌이 이뤄지는 것은 K2 등정에 성공한 다음의 하산길에서 해롤드가 추락해 다리가 부러지고 난 다음이다(이 작품의 원작은 본래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성공한 연극이었는데, 연극의 주무대로 설정된 장소도 바로 이 지점이다).

해롤드는 자신을 버리고 혼자 내려가라고 다그치지만 테일러는 함께 남겠다며 고집을 피운다. 해롤드가 외친다. “넌 평생 이기적으로 살아왔잖아! 이제 와서 왜 이래?” 테일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눈물을 흘린다. “난 성공했지만 내 인생은 쓰레기였어. 오직 너와 함께 산에 오를 때에만 품위(dignity)를 맛볼 수 있었지. 나도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싶단 말이야!”

테일러는 비로소 고백한다. 그토록 경멸적으로 말해왔던 해롤드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그 조용한 연구생활이 사실은 얼마나 부러웠는지를. 해롤드의 대답은 그러나 아름답고 잔인하다. “품위를 찾고 싶다고? 그렇다면 너 혼자 내려가. 내려가서 내 아들을 돌봐 줘, 그게 품위야.”

영화 속에서 테일러가 품위를 들먹일 때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저 거칠 것 없는 녀석도 뭔가 자기 삶에서 결핍된 것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구나. 자본주의적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내밀한 질투의 시선으로 갈구하던 것, 그것은 바로 품위였다.

‘K2’는 어떤 뜻에서 테일러가 품위 있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한 인간이 평생토록 쌓아온 캐릭터를 그 뿌리에서부터 변화시키다니…. 역시 산은 위대하다. (시나리오작가)

besmart@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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