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우선 수상(?)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처음 대할 때도 그랬다. 허진호 감독은 제목부터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나 보다. ‘봄날은 간다’라니….
노래 때문인지 어딘지 신파 냄새도 났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은은히 오래 남는 국향같은 가을 냄새가 나고, 대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에서 지나간 내 사랑의 소리가 저벅저벅 걸어와 나를 사정없이 뒤흔든다.
봄날은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벚꽃이 가장 찬란할 때 화르르 다 져버리 듯 찬란한 것은 더 빨리 가버린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상우(유지태)의 대사는 우리가 너무 잘 알아서 거부하고 싶어하는 사랑의 화두이자 인생의 화두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자극적이고 소란스런 상업 영화 속에서 모처럼 여운과 향기를 느끼게 해 준 반가운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20대 후반의 녹음기사 상우(유지태)와 30대 초반의 지방 방송국 PD인 이혼녀 은수(이영애)가 함께 일을 하면서 겪는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다.
보통 멜로라면 특별한 연인들이 특별한 사연으로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강한 구조를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너무나 평범해서 사소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거기에는 소리를 듣고 있는 그 침묵의 시간까지 요구하지만 관객은 기꺼이 그 시간도 받아들인다. 극적이지 않은 구조에도 시종 긴장을 잃지 않고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풍부한 심리적 디테일로 관객들에게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거의 모든 씬들이 투 쇼트(two shot·한 화면에 두 피사체가 있는 것)의 롱 테이크(long take·한 화면을 길게 찍기)로 이루어졌는데 그 효과는 지대하다. 예를 들면 은수가 자기 아파트를 찾아 온 상우에게 “헤어져” 하면 상우가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하고 말하는데, 대사 전후의 침묵이 꽤 긴 편이다. 그러나 배우들의 단독 쇼트를 쓰지 않고 투 쇼트로만 보여주니까 (더구나 이영애는 머리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관객은 배우의 감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영화를 이해하게 된다.
배우는 이영애와 유지태지만 영화 내내 관객이 주연배우로 동화되어 가게끔 하는 장치들이 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자리에 꽤 오랫동안 눌러 앉아있게 만드는 힘도, 저마다 가슴에 지니고 있는 사랑의 앙금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술에 취해 한밤 중 택시 타고 강릉까지 한 걸음에 달려가는 사랑에 빠지고픈 가을이다. 사랑에 상처받아 꺼이 꺼이 울고 있을 때, 소주병에 술잔을 꼽아 내주며 “열심히 해 임마”하는 박인환 같은 아버지가 있다면 가을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봄날은 간다. 그러나 찬란한 봄날은 가기 때문에 다시 오는 것이 아닐까.
윤석호 <팬 엔터테인먼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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