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기도하던 안중근이 현장에서 사살된다. 1919년 파고다공원의 불법집회(3.1운동)가 무산된다. 1945년 베를린(!) 원폭투하로 전쟁이 끝난다. 1988년 ‘나고야’ 올림픽에 이어 2002년 월드컵은 ‘일본에서만’ 열린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처럼 조선이 계속 일본의 통치하에 남아 있다는 역사적 가정에서 출발한 영화다. 배경은 2009년의 조선 경성(京城).
조선해방운동결사인 ‘후레이센진(不逞鮮人)’의 테러가 잇따르자 조선계 특수수사요원인 사카모토와 그의 경찰대 동기인 사이고가 투입되고, 사카모토는 마침내 고대 유물을 둘러싼 양국간의 엄청난 역사적 비밀과 일본의 음모를 알게 된다.》
이시명 감독의 ‘로스트…’는 대담한 역사적 설정과 80억원이 넘는 총 제작비, 그리고 장동건이라는 스타 때문에 제작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뚜껑이 열리고 난 후 모아진 대략적인 평가는 ‘30대 초반 신인 감독의 데뷔작으로는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이었다.
경성의 자동차들이 일본처럼 좌측통행하고, 광화문 사거리의 이순신장군 동상 대신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서 있다거나, 한글없이 일어와 영어로만 돼 있는 거리 간판 등의 세심한묘사는 ‘바뀐 역사’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쇼트마다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한 영상은 새로움은 없지만 도회적인 감각은 넘쳐난다. 특히 초반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액션장면과 총격전은‘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전성기의 ‘홍콩 느와르’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평소 이감독이 “나는 신인 감독이 아니라 그냥 감독”이라고 밝혀왔던 점에 비춰 이 영화를 본다면, 평가는 인색해 질 수 밖에 없다.
가장 아쉬운 점은 ‘감정과 이미지의 과잉’이다.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한 슬로 모션과장중한 음악이 너무 자주, 그리고 길게 등장해 관객은 감정을 ‘강요당하는’ 느낌이다. 약간 과장한다면 2시간13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절반이 슬로 모션이다. 일본인들이 거리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모습과 조선인 아지트가 습격받는 장면이 교차 편집된 부분에서는 무려 6분간 슬로우모션이 이어진다. 총격전과 사람이 죽는 장면만 나오면 어김없이 화면은 ‘느려진다’. 멋진 액션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낀다면, 이같이 비슷비슷한 느린 장면이 계속 이어진 탓이다.
오케스트라 반주로 장엄한 남녀혼성합창이 10여분간 이어지는 등 영화 장면의 80%이상 덧입혀진 음악도 늘 관객의 감정보다 앞서간다.
사카모토가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에 눈뜨게되기까지가 너무 길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예닐곱살짜리 조선 소년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 굳이 필요했는가도 의문이다. 자극적인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돼 있다.
‘로스트…’는 그동안 한국의 ‘블록버스터’의 약점으로 지적돼 온 드라마를 담기 위해 노력했지만, 친구에서 적이 된 두 남자의 우정과 갈등을 담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장동건의 경우 상당 분량의 일본어 대사를 소화하는 등 고생한 모습을 보였지만, ‘친구’에서 보여준 연기를 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 배우 나카무라 토오루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우나기’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2월1일 개봉.
강수진 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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