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와 시청자 단체들은 이번 ‘너구리사건’이 1998년 방송가에 큰 파문을 일으킨 KBS ‘다큐멘터리 수달’처럼 방송의 신뢰성과 공공성에 큰 상처를 준 조작 사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MBC는 지난달 26일 오락프로 ‘! 느낌표’의 한 코너인 ‘다큐멘터리-이경규 보고서’에서 서울 양재천에 서식하고 있는 야생 너구리를 그물로 잡는 장면을 방영했다.
그러나 양재천 부근에 사는 시청자가 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 30일 밤 ‘! 느낌표’의 김영희 책임PD가 연예정보 프로 ‘섹션TV 연예통신’에 나와 “26일 ‘이경규 보고서’에서 방송한 너구리 포획 장면은 연출된 것”이라며 “그 장면이 실제 상황인 것처럼 시청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데 대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MBC의 조작은 지난 3개월간 야생 너구리를 잡는 과정을 방송해 온 제작진이 지난달 20일 오후 그물망에 걸린 너구리 한 마리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그물망에 포획되는 ‘결정적 순간’을 촬영하지 못한 제작진은 다음날 밤 너구리를 그물망 50m 밖에 풀어놓고 다시 이를 잡는 과정을 촬영했다.
MBC는 26일 방송 때 잡았다 놓아주는 과정과 설명을 생략한 채 실제 야생 너구리를 잡는 것처럼 방송했다. 진행자인 개그맨 이경규씨는 “너구리가 움직인다. 드디어 그물에 잡혔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실제 상황인 듯 중계했다. 하지만 이씨는 “방송이 나간 후 제작진으로부터 연출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MBC는 지난해 11월 ‘! 느낌표’를 시작하면서 ‘정직하고 바른 사회를 만들자’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나 결과적으로 시청자를 속인 셈이 됐다.
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조정하 정책실장은 “‘섹션TV…’에서 MBC 제작진의 ‘고백’을 보지 못한 시청자는 아직도 야생너구리 포획 장면이 연출된 것인지 모를 것”이라며 “시청률 경쟁에 내몰린 제작진의 우발적 실수라고 해도 공영방송인 MBC는 구조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박성희 교수는 “이 사건은 상식 수준의 방송 윤리가 시청률 경쟁에 뒷전이 된 대표적인 사례”라며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방송윤리 확립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