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영화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작됐다. 국산 네 편을 찍으면 외화 수입 쿼터 한 편을 주는 정부 시책에 맞추어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기형의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영화제에서 상을 타고 외화 수입쿼터를 배정받은 새마을영화, 반공영화들 중에는 개봉관에 걸려보지도 않고 창고로 들어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축구도 영화도 ´국산의 힘´▼
한국 영화는 간신히 외화 수입 규제와 영화관의 방화 상영 일수를 강제하는 스크린 쿼터로 버티어 나갔다. 영화인은 물론 영화 관객들도 잘된 할리우드 영화 앞에서 절망했고 우리에게는 영화 만드는 재주가 모자란다는 자탄에 빠졌다.
국산 영화를 철저히 외면하고 살다가 서울 단성사에서 실로 오랜만에 국산과 다시 접한 것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였다. ‘한국 영화도 볼 만하구나’ 하는 인식을 새롭게 한 뒤로 입소문에 오르내리는 한국 영화는 반드시 가서 보는 편이다. 최근에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가 관객 400만명을 넘어섰고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이후 하루 평균 관객이 두 배 이상 늘어나 50만명을 돌파했다.
근년에 국산 영화의 질이 높아지면서 작년 말 기준 관객 점유율이 46%에 이른다. 한국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내 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팽팽한 경쟁을 벌이는 나라이다. 칸영화제가 취화선에 감독상을 준 데는 한국 영화의 질적 양적 성장을 인정해 준 의미도 담겼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는 바야흐로 중흥기를 맞았다. 우수한 젊은 인력이 영화판으로 몰려오고 금융기관들이 대박을 꿈꾸며 영화제작에 큰손을 들이민다. 이렇게 활발한 선순환이 이루어지다 보면 현대자동차 1년 순이익을 영화 한 편으로 벌어들이는 세계적인 블록버스터가 충무로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축구도 영화처럼 관객의 애정을 빨아먹고 자란다. 국산 축구는 관객을 야구 농구에 뺏겨버리고 늘 텅빈 스탠드에 둘러싸여 경기를 했다. 일본 프로축구 J리그는 흥행에 성공을 거두는 데 비해 한국의 K리그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을 가득 메운 4만 관중은 세계 최강의 프랑스와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한국 축구가 더 없이 대견스러운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축구 해설가들을 만난다. 택시운전사들도 정치평론을 그만두고 축구 해설을 한다. ‘프랑스가 몸을 아꼈다’ ‘전력 노출을 꺼렸다’는 해설이 없지 않지만 한국팀도 마찬가지 부담을 안고 싸웠다. 누가 뭐래도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팀과의 경기 내용은 유럽 축구에 5 대 0으로 깨지고 다니던 옛날의 한국 축구가 아니었다. 폴란드팀의 예지 엥겔 감독은 한국 프랑스 평가전에 대해 “어디까지나 평가전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고 “한국을 1승의 제물로 삼겠다”고 공언했지만 일화와의 평가전을 보면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고 정치 경제 문화이며 예술이다.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와 한국 축구가 좋은 성적을 냄으로써 얻는 국가 이미지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축구만 잘하고 정치 경제 등 다른 모든 것을 ‘깽판’치는 남미 국가들을 부러워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정치 경제가 안정되고 문화가 꽃을 피우는 프랑스에서는 축구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낸다. 한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 자동차 선박은 세계 시장에서 1, 2위를 다툰다. 우리가 찍는 영화는 관객의 갈채를 받으며 세계가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여기에 축구까지 잘 해보라. 한국은 남미형 국가가 아니지 않은가.
▼국가 이미지 쑥쑥▼
축구와 영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잘하지 못하던 분야라서 최근의 성장이 더욱 놀랍고 자랑스럽다.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이 멀지 않고 월드컵 16강도 가까이에 와 있다. 16강을 넘어 8강을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나라에서 사변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찢고 발기는 정쟁에 신물이 나고 진동하는 부패의 악취에 넌덜머리가 난다. 설기현 박지성아 프랑스전에서처럼 폴란드의 골문을 향해 피버노바를 날려라. 차두리야 이번에는 실축하지 말아라. 폴란드 골키퍼가 출렁거리는 그물을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할 때 우리 모두 일어나 환호작약하리라.
이제 월드컵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