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80억 어디다 썼지?"…한국형 블록버스터 낙제점

  • 입력 2002년 7월 4일 18시 18분


영화 '아 유 레디?'
영화 '아 유 레디?'
《“도대체 80억원을 어디에 쓴 거야?”

2일 한국 최초의 판타지 어드벤처 장르를 표방한 ‘아 유 레디’(12일 개봉)의 기자 시사회가 끝난 뒤 나온 객석의 반응이다. “Are You Ready?” 냐고. 천만의 말씀. “유 아 낫 레디(You Are Not Ready)”라는 따가운 독설도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문장의 주어가 이 작품의 제작사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정은 어떤가. 올해 개봉된 ‘2009 로스트 메모리즈’(서울 88만명) ‘예스터데이’(12만명) 등 80억원 이상의 총 제작비가 투입된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잇따라 비평은 물론 흥행에서도 예상 밖으로 부진했다. 대략 8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서울 관객 기준으로 100만명 안팎이다. 흥행 실패에 따른 상처도 적지 않다. 대우증권은 최근 ‘예스터데이’ 등의 흥행 실적 부진을 이유로 투자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적정 주가를 낮추기도 했다.》

영화 '예스터데이'

▼80억의 미스터리?▼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뼈아픈 ‘농담’이 있다. ‘예스터데이’나 ‘아 유…’를 본다면 ‘2009…’는 ‘명작’으로 보인다는 것.

‘아 유…’는 테마 파크에서 환상의 정글 세계로 빠져들어간 6명의 모험을 그렸다.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이들은 이 모험을 통해 우정과 사랑,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된다.

이 작품은 판타지 어드벤처라는 새로운 ‘메뉴’를 내세웠지만 식탁에는 판타지도, 어드벤처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 작품은 영화와 관객이 만날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는 데 몹시 인색하다. 주인공들이 왜 위험에 빠지고, 어떤 규칙을 통해 이 모험을 겪어 나가며, 어떻게 현실로 다시 빠져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 특히 함께 모험을 겪는 6명 중 2명의 고교생은 늪에 빠져 죽은 것처럼 처리됐다 영화 말미에 아무 설명도 없이 갑자기 열차를 타고 살아서 나타난다.

영화는 ‘옥에 티’가 아니라 거꾸로 ‘티에 옥’을 찾아야 할 형편이다. 비와 모래바람을 맞고 진흙탕을 건넌 여주인공의 얼굴은 마스카라에 립스틱까지 화장이 완벽하게 남아있고, 양말은 언제나 새하얗다.

영화평론가 주유신은 “‘아 유 레디?’는 어드벤처와 드라마를 억지로 뒤섞었다”며 “다른 실패한 블록버스터의 장점인 컴퓨터그래픽 등 볼거리마저 없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80억원의 ‘돈 냄새’는 영화에서 거의 맡을 수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같은 대작들의 잇따른 몰락으로 지난해 한때 나돌았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비관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은 무엇보다 ‘작아진 감독들’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다시 감독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계가 좋은 시나리오만 있다면, 스타급 배우만 캐스팅하면 돈버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세 작품 모두 데뷔하는 감독이 80억원짜리 대작을 연출했다. 정말 제대로 된 ‘감독’이 가능하겠나. 한마디로 요즘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는 감독은 사라지고 제작자와 투자자, 배우들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감독 ‘풀(Pool)’의 한계는 물론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한 ‘적신호’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쉬리’ ‘친구’ 등 몇몇 영화가 만들어낸 흥행 신화와 ‘묻지마 투자’식의 과잉 투자가 영화계 전반의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했다는 지적이다.

영화사 ‘백두대간’ 유승찬 전무는 △제작준비단계인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비효율성 △투자 확대보다 제작비 상승 속도가 3배나 빠른 기현상 △시장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배우 개런티 등을 ‘블록버스터 재앙론’의 징후로 제시했다.

▼시장(市場)의 복수?▼

전문가들은 거대 제작비가 흥행의 보증수표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 제작비의 엄청난 상승 추세와 달리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 대박 영화의 순수제작비는 30억원 미만이다.

영화제작사 ‘씨네월드’ 이준익 사장은 “한국 영화계는 국내 시장의 규모와 인력 풀을 감안할 때 5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를 만들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에 기초해 웃음과 눈물 등 독특한 우리 정서와 감각을 담은 ‘한국형’ 영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영화의 규모가 커지면서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옥석을 가리는 철저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며 “돈을 주면서 영화만 만들어달라는 주문에 밀려 이런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한국 영화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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