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노인네에게 들을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인터뷰 요청에 쑥스러워 하던 신구씨의 얼굴 잔주름 위로 특유의 자상한 미소가 잔잔하게 퍼져갔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인터넷을 떠도는 작자 미상의 글 ‘아버지는 누구인가’(본보 13일자 A19면)가 이 땅의 아들 딸들을 울리는 요즘, 지난달 하순 개설된 탤런트 신구(66·본명 신순기)의 팬 사이트에도 ‘이 시대의 아버지상’ 신구에 대해 애정이 담긴 글들이 넘쳐난다.
요즘 CF와 TV드라마, 영화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위엄과 비애, 자상함을 넘나든다. ‘니들이 뭘 아냐’고 일갈하면서도(CF), 죽어가는 아들을 지키지 못해 가슴을 치며 울고(TV), 아버지의 뜻과 다른 길을 선택한 아들을 말리다가도 결국 끌어안는(영화) 아버지. 모두 다른 이미지들이어도, 그 안엔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한가위를 앞두고 ‘이 시대의 아버지상’ 신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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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9일)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 인터넷 팬사이트에 “신구님 생신인데 선물을 보내고 싶다”는 글이 떴다고 했더니 허허, 웃고 만다. CF, 드라마, 영화 속 신구의 대사, 그리고 그가 붙인 주석들을 통해 아버지들의 마음 풍경 한 자락을 들춰보자.
①“니들이 게맛을 알아?” (롯데리아 CF에서)
이 CF가 왜 인기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가진 건 배 한 척밖에 없는 늙은 어부가 ‘니들이 알긴 뭘 아냐’고 내지르는 당당함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대개 늙은 사람들은 ‘노약자’ 취급을 받는데, 여기선 늙은이가 더 당당하잖아. 그게 좀 ‘깨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원래는 그게 더 낮고 무거운 목소리 톤으로 설정됐던 거야. 그러면 너무 무겁지 않나 싶어서 내가 좀 바꿔봤어.
아버지의 권위? 윗세대의 기강과 권위는 당연히 있어야지. 하지만 그게 따라오라고 요구해서 되는 일은 아니거든. 어른들이 스스로 잘해야 아이들이 따르지.
내가 내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정직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들을 앉혀놓고 그런 말을 해본 적은 없어. 내가 그렇게 사는 걸 보여주는 게 최선인 거지. 실제로 내가 모범을 잘 보이고 있는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지만…. 아버지들은 아마 다 마찬가지일거야.
‘게맛’과 비견되는 인생의 참맛이라…. 그건 살고 있을 때는 잘 모르는 거야. (웃으며) 나는 술 마실 때 기분이 좋지. 기분 나빠서 술 마셔본 적은 없어. 술 마시고 취기가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느낄 때, 그 기분 정말 좋다고. 술은 밥먹듯이 마셨는데, 모 방송사에서 하는 건강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터라 요즘 술도 못마시고 답답하다니까.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술 안마시기로 했는데, 월드컵때 약속 못지켰어. 아, 술 먹을 줄 아는 사람이 그걸 어떻게 맨정신으로 봐.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소주 마시는 분위기를 특히 좋아하지. 요즘은 사람들이 다 차가 있다고 해서 술마시기도 어려운 분위기지만.
②“아빤 악사고, 넌 부잣집 아들이야. 고급식당에서 밥먹고 있는 재벌집 자식이야”(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아버지들 심정이 다 그렇지, 뭐. 늘 자식들이 안쓰럽고, 잘 되었으면 좋겠고…. 나는 아들 하나(28)가 있는데, 볼 때마다 안쓰러워. 90년에 미국 보내 고등학교, 대학을 다 그곳에서 나오고 지난해에 돌아왔는데, 꼭 영어를 배워야 살아남는다는 생각만 갖고 아들을 미국에 보냈던 건 아냐.
내가 아들을 늦게 얻었는데, 우리 아들이 2대 독자야. 생각해보니까 나 죽으면 내 아들은 홀홀단신인데,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상황을 견뎌내는 연습을 시켜놔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 녀석이 견디고 이겨내는 게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부모 품을 떠나보내서 죄책감을 느껴. 미안하고, 안쓰럽고…. 한국 사회는 인맥이 중요한데 우리 아들은 고교 동창이 없잖아. 내가 근시안적인 생각 때문에, 그 녀석을 위한답시고 되레 벽을 하나 더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아버지로서 해준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 생각….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지. 나라면 우리 아들 녀석처럼 혼자 지내는 상황을 못견뎠을 것같아. 그래서 같이 있을 땐 그냥 보고만 있어도 나는 속으로 좋아. 내가 좋은지 어쩐지 그 녀석은 모르겠지,뭐. 내가 좋다는 내색을 안하니까.
③“아들 두 놈을 두고 바랐던 것은 나보다 더 나은 문리가 트이고, 나보다 더 학식있고 기품있는 선비가 되어서 우리 가문을 빛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놈은 의병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또 한 놈은 듣도보도 못한 상놈 짓을 하고 다니고….” (영화 ‘YMCA 야구단’에서)
그럼! 나도 아들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지. 아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면 그게 늘 좋기만 한 게 아니라고. 내가 자라면서 갖고 있는 내 콤플렉스, 변하고 싶은데 참 안변하는 것들이 있잖아. 아들에게서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마음이 무거워. 날 닮았다고 야단치는 심정, 기자 선생은 그런 마음 이해하기 어려울 거요. 이젠 머리도 크고 해서 대놓고 뭐라고는 못하지만….
우리 아들도 곧 결혼할텐데, 결혼시킨 뒤 최소 6개월∼1년은 함께 살아봤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한편으론 며느리 들어오면 내가 지금처럼은 못살 것 같아. 차려입는 것도 거추장스러울테고. (웃음) 그런 게 벌써부터 고민이 된다니까.
그러고보니 ‘8월의 크리스마스’ ‘반칙왕’ ‘네 멋대로 해라’ ‘YMCA 야구단’에서 늘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 역할을 맡았네. 나는 연기자니까 오는 역을 내가 어떻게 소화하느냐, 그런 게 고민이지, 뭐.
나는 배우는 인격이 보여지는 거라고 생각해. 특히 TV에서의 이미지는 특별히 과장된 악인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 자연인으로서의 연기자, 본래의 모습이 바탕이 되어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TV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내 인격이라고 생각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TV 연기를 통해서 많이 보여질 거고.
이번 추석엔 아들이랑 어머님 산소에 다녀와야지. 어머님 산소 앞에서 아들에게 오랫동안 못했던 말, 그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