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세계경제가 모두 깊은 침체에 빠져든 요즘 디플레이션이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인플레의 반대인 디플레는 단순화하자면 물가가 하락하는 상황이다. 물가가 싸진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물가 하락은 생산한 물건에 비해 이를 살 소비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소비자의 구매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인데, 구매력 저하가 가져오는 물가 하락은 소비자에겐 당장 즐거움을 줄지 모르나 이는 악순환의 한 과정일 뿐이다. 물건값을 내려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수익이 악화되고 이는 고용 감소로, 고용 감소는 소득 감소로 이어진다. 근로자는 또한 소비자이기도 하므로 소득 감소는 소비 위축으로 귀결된다.
디플레는 이렇게 그 자체로도 유쾌하지 않은 일이지만 자본주의의 신봉자들에겐 더욱 끔찍한 기억을 끄집어낸다는 점 때문에 피하고 싶은 단어다. 그건 디플레가 최악의 상황으로 심화된 형태, 바로 공황이다. 공황이 남긴 역사적 상흔은 자본주의자들에겐 마치 ‘주홍글씨’의 저주처럼 깊고 선명하다.
현 자본주의 체제가 경험한 공황은 1929년 뉴욕 맨해튼 월가에서 시작됐다. 10월24일 역사에 ‘검은 목요일’로 기록된 이날 월가의 증권거래소 주식 가격이 폭락하면서 대공황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 수년간 미국인의 삶, 세계 인류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됐다.
벌써 73년 전 일이지만 당시의 악몽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미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지금은 당초 불황을 뜻했던 ‘depression’이라는 단어 대신 ‘recession’이라는 온건한 표현을 쓰고 있을 정도다.
공황은 도대체 풍요한 나라 미국에 어떤 상처를 입혔을까.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공황이란 말이 전하는 다소 건조한 이미지와 달리 몇몇 할리우드 걸작들은 그 공황 자체를 미시적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대공황시대는 미국 영화에서 심심찮게 사용되는 시대적 배경이다. 어둡고 힘든 혼돈의 시절이었던 만큼 극적인 파노라마들로 가득 찬 시기였고, 그래서 할리우드의 영화작가나 제작자들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영화 속 대공황이 전하는 1차적 이미지는 빈곤과 좌절, 한숨이다. 제1차 세계대전 특수를 업고 흥청거리던 미국에 닥친 이 재난이 허리케인보다 막강한 위력으로 미국 사회 곳곳을 어떻게 초토화했는지는 40년대 흑백영화 ‘분노의 포도’에 잘 나타나 있다. 존 스타인벡의 원작소설로 너무도 유명한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훌륭하다.
영화에는 당시 비참했던 농민들의 생활이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생생히 담겨 있다. 당대의 명우 헨리 폰다가 분한 주인공 톰은 대공황과 모랫바람에 농토를 잃고 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하는 농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대공황과 가뭄에 쫓겨 농토를 잃고 이주하는 자동차들의 긴 행렬, 빵 배급을 받으려고 긴 줄을 선 사람들의 휑한 표정,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
‘분노의 포도’는 이런 사실적 장면들 때문에 개봉 당시 미국의 우익 집단으로부터 ‘불순한 영화’로 지목돼 몇몇 도시에서는 상영이 저지당하기도 했다.
‘분노의 포도’가 대공황기를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본 일종의 보고서였다면 찰리 채플린의 천재성이 압축된 ‘모던 타임즈’는 대공황기와 자본주의에 대해 풍자의 송곳을 들이댄 작품이다.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간 주인공은 수감생활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지만 감옥을 떠나기가 싫다. 실업자들로 넘쳐나는 거리로 나가느니 최소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는 감옥 안이 훨씬 더 살기 좋기 때문이다. 매카시 선풍 때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던 채플린이 그린 대공황기 절망적인 노동자들의 초상화에는 자본주의의 야수성에 대한 은유와 풍자가 넘쳐난다.
이명재/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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