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피플]마지막 간판쟁이 조종태 "꿈을 그렸지"

  • 입력 2003년 2월 21일 17시 30분


2월11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 대지극장. 그의 작업장은 해가 들지 않는 극장 뒤켠 허름한 가건물에 자리잡은 터라 바깥보다 훨씬 추웠다. 어두컴컴한 형광등 조명 아래 어지럽게 놓여진 낡은 영화간판은 분위기를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일감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마 하루 예닐곱 편을 상영하는 복합영화관이 강남에 들어서면서부터였을 게다. 10여명의 제자들이 복닥거리던 미술부에 이젠 그 혼자 남았다. 코를 찌르는 페인트 냄새를 함께 맡을 동료도, 묵직한 간판을 대신 옮겨줄 후배도 없는 터라 더없이 외롭고 쓸쓸하다.

‘마지막 간판쟁이’ 조종태씨(63)는 그날도 ‘그림’, 아니 ‘영화간판’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님 춥지 않으세요?” “아이고, 이런. 난롯불 꺼진 것도 모르고 붓만 잡고 있었네.” “바쁜 시간에 찾아온 것 같다”고 미안해했더니 “이 바닥에서 일감 없어진 게 언제 적 일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면서 한숨부터 내쉰다. 난로가 꺼진 줄도 모르고 데생작업에 여념이 없던 간판은 3월에 올릴 할리우드 영화. 40년을 벗삼아온 붓 솜씨로 2~3일이면 해치울 일이지만 마감이 한참 남아선지 일에 속도가 붙지 않는다.

“‘간판쟁이’ 일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난 간판쟁이란 말 싫어하는데…. ‘쟁이’란 표현이 원래 좋은 뜻인데 요사이엔 천하다는 말처럼 들리더라고. 기사에도 ‘간판화가’나 ‘간판미술가’라고 적어줬음 해.” 그는 “사나흘씩 밤을 새워가며 마감날짜를 맞추던 시절이 그립다”면서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들이 하나 둘씩 강남으로 옮겨가더라고. 그러더니 그림은 촌스럽고 스틸사진이 세련됐다나. 옛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젊은 친구들이 간판쟁이들을 죄다 몰아낸 셈이지.”

조씨와 40년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한 영화간판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불과 10여년 전부터다. 인쇄기술의 발달로 간판용 스틸사진이 제작되기 시작했고, 극장주들은 인건비가 만만찮은 그림간판보다 사진간판을 선호했다. 현재 서울에서 대형 그림간판을 올리고 있는 곳은 그가 몸담고 있는 대지극장이 유일하다. 종로3가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이 복합상영관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헐리기 전만 해도 단성사에서 간판을 그리던 동료 간판쟁이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한다. 그가 고향으로 훌쩍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사람이 바로 조씨. “단성사 헐리고 나서 고향으로 내려간 그 친구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 그래도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적적하진 않았는데, 요샌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쓸쓸하네그려.”

조씨는 전남 강진군의 ‘깡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꿈은 화가였다고 한다. 호구를 위해 무작정 찾은 곳이 목포극장 미술부. “간판쟁이 수입이 쏠쏠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 길로 곧장 극장으로 달려가 일을 시켜달라고 떼를 썼다. 선배들로부터 페인트통, 연탄집게로 맞아가며 배운 그림으로 밥벌이를 시작한 지 올해로 꼭 40년째.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미술대회는 물론이고 꽤 굵직한 미술전에서 상을 받기도 했어. 대학을 다녔었더라면 하는 게 가장 큰 아쉬움이야. 하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있었겠어. 재주를 써먹으려면 간판쟁이가 최고였지. 그렇게 시작한 게 벌써 40년이나 흘렀으니 시간이 빠르긴 빠르네.”

조씨는 불과 3년 만에 목포극장에서 책임자 자리를 꿰찼다. 솜씨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극장 미술부는 공연팀들의 대기실로도 쓰였는데, 코미디 공연차 목포에 내려온 코미디언 고 서영춘씨가 조씨의 그림을 보고 “그 정도 실력이면 서울에서도 통할 텐데 당장 서울로 올라가라”고 권했단다. “유명한 코미디언이 27살짜리 간판쟁이의 그림을 인정해주니 하늘을 날 것 같더라고.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지. 그런데 생각보다 텃세가 심하더라고.”

3월 개봉 예정인 영화의 간판을 그리고 있는 조종태씨.“대지극장에서 간판을 그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는 조종태씨.(왼쪽부터)

●세월에 밀려 쓸쓸한 붓질 … “자연을 담고파”

극장주들은 “시골 그림을 갖고 감히 어디를 찾아왔느냐”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테스트를 해보고 나선 조씨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상영된 내로라하는 영화의 간판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조씨가 그린 영화의 간판을 보지 않은 서울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극장에 터를 잡고 있었는데, 종로 충무로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간판은 모두 내가 그렸어. 당시엔 모든 영화가 종로 충무로 개봉관을 거쳐갔으니까 모든 간판을 내가 그린 셈이지.”

그는 특히 “광화문 국제극장 전면을 감싼 ‘십계’의 대형간판, 알파치노의 얼굴을 그리고 지우길 반복했던 ‘대부’ 간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또 명동 중국대사관 앞길 벽면에 걸어놓을 수십개의 영화간판을 그리느라 밤샘 작업을 했던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덧붙였다. 영화간판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에서 개최한 각종 행사 간판은 물론이고 과천에 새로 들어선 놀이공원의 대형간판도 실력 좋기로 소문난 그의 차지였다. 대형 걸개그림에 자신이 없던 대학교수가 돈을 주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미대생들이 간판그림을 배우겠다고 찾아와 제자를 자처했으니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이 이미 반쯤은 이뤄진 셈이었다.

“복닥거리던 작업실이 썰렁한 게 가장 안타까워. 제자들이 많을 때는 제자들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간판쟁이들에겐 80년대가 최고였어. 일이 많은 달엔 요새 돈으로 1000만~2000만원씩 벌었으니까.” 간판쟁이는 술도 요정에서만 마신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을 정도였다는 게 조씨의 얘기다. 조씨에게 요즘은 월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물었다. “한 200만원….” 이순을 넘긴 노인의 돈벌이로는 적잖은 금액인데도 그에겐 뭔가 아쉬운가보다. 말끝을 흐리는 건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듯했다.

그의 소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의 자연을 맘껏 그려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 한 곳에서라도 ‘평생의 벗’인 그림간판이 계속 올려지는 것이다. 그중 한 가지는 곧 이뤄질 것 같다. 대지극장이 복합상영관으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간판을 원하는 곳이 모두 사라지면 고향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언제부턴가 그림간판도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사진을 찍어 그림을 모아두고 있어. 화가가 뭐 별건가. 사람은 제 생김새대로 자연은 제 모양새대로 화폭에 고스란히 담으면 그게 바로 예술이지.” 낙향을 얘기할 때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아마도 첫번째 바람보다 두 번째 소망이 이뤄지길 더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송홍근 주간동아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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