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24일 오전 (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 극장에서 열린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예상을 깨는 이변이 속출하는 자리였다. 작품상은 예상대로 최다 부문 후보(13개)에 오른 ‘시카고’가 받았지만, 감독상은 시상식에 참석조차 못한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돌아갔다. 유럽에서 활동중인 폴란스키 감독은 1978년 13세 소녀와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미국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고 있어 오래 전부터 ‘불참’이 예상됐었다. 가장 유력한 감독상 수상자로 거론되던 마틴 스코시즈(‘갱스 오브 뉴욕’)는 감독상 후보에 4번이나 오르고도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한 ‘불운의 감독’이 됐다. 작품 여우조연 미술 의상 음향 편집 등 6개 부문에서 상을 탄 ‘시카고’를 제외하고 다수 부문 후보에 올라 수상이 유력시됐던 작품들이 참패한 것도 올해의 이변이다. ‘시카고’의 뒤를 이어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갱스 오브 뉴욕’은 단 하나의 상도 타지 못했다. 또 9개 부문 후보에 오른 ‘디 아워스’도 니콜 키드먼의 여우주연상 수상 하나에 그쳐야 했다.
남우주연상도 잭 니컬슨이 유력하다는 관측과 달리 애드리언 브로디(‘피아니스트’)에게 돌아갔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해 ‘만화 강국’ 일본의 위상을 과시했다. 올해 최다 수상작인 ‘시카고’는 1930년대를 배경으로 살인조차 가십거리로 삼는 세태를 풍자한 뮤지컬. ‘올리버!’(1968년)이후 35년 만에 처음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뮤지컬 영화다. 한편 올해 시상식을 앞두고 관심을 끌었던 것은 수상자들이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할 것인가 하는 것. 이날 시상식에서는 수상자 5명, 시상자 2명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거나 평화를 기원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남우주연상을 탄 애드리언 브로디는 “영화(피아니스트)를 만들면서 전쟁이 가져온 슬픔과 비인간적인 면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실히 깨달았다”며 “누구를 믿든 모든 이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이 전쟁이 빨리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해 기립 박수를 받았다.
또 ‘그녀에게’로 각본상을 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스페인)은 “이 상을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국제 법질서를 옹호해온 분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볼링 포 컬럼바인’으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탄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이 전쟁에 반대한다! 부시 대통령은 창피한 줄 알라!”고 외치다 야유와 박수를 함께 받았다. 이날 시상식이 열리기 전 스타들의 입장식인 레드 카펫 행사는 야외 객석과 떠들썩한 인터뷰없이 단촐하게 진행됐다.
한편 공로상 수상자인 배우 피터 오툴은 공로상 시상을 80살이 되는 10년 뒤로 미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날 시상식에 참가해 상을 받았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