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묘한 흥분이 내 몸을 감싼다. 첫 무대에 설 때의 그 느낌 그대로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잠깐의 정적과 함께 이어지는 관객들의 갈채와 환호가 기다려진다.
▼성악에 흥미잃고 뮤지컬 배우로 ▼
성악을 전공한 미국 줄리아드 음대 시절, 성적도 좋았고 주위의 기대도 컸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클래식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 시절 내 유일한 꿈은 결혼해서 현모양처로 사는 것일 정도로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갈 즈음 성악 담당 개인 반주자였던 아일린이 내게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King and I)’의 오디션을 제안했다. 그 전까지 내게 뮤지컬이란 중학교 시절 단체관람으로 본 ‘사운드 오브 뮤직’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전부였다.
그런데 아일린에게서 뮤지컬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와는 거리가 멀 줄 알았던 뮤지컬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1년 6개월의 길고도 가슴 졸였던 오디션을 거쳐 티엥 왕비 역을 맡아 브로드웨이 첫 오프닝나이트에 서던 날, 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2시간여의 공연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공연이 끝나고 쏟아지는 관객들의 갈채, 내 삶은 새롭게 시작됐다.
그렇게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배우 생활을 하던 나는 1997년 서울에서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연배우를 뽑는다기에 무작정 연출자 윤호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은 무모해 보였지만 운명과도 같았던 명성황후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어렵게 캐스팅돼 뉴욕 공연까지 남아 있던 연습기간은 단지 보름뿐이었다. 동료 배우들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부를 곡은 전체 수록곡 중 절반에 가까운 20여곡이나 됐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벅차게 느껴졌다.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옛 우리말이 많았던 가사의 뜻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뮤지컬의 미 브로드웨이 공연 자체가 국내에서조차 미친 짓이라고 여겨진 탓에 모두 힘들어 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명성황후 역을 맡은 나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름 동안 악보와 명성황후에 관한 책을 하루 24시간 떼지 않으며 이태원이 아닌 명성황후로 살았다. 처음에 ‘과연 저 여자가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던 선후배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도 차츰 내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결국 ‘명성황후’ 뉴욕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수없이 많은 앙코르 공연을 하면서 ‘명성황후’는 내게 단지 뮤지컬 작품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명성황후’를 하며 울고 웃던 수많은 추억들이 생각난다. 명성황후 시해 장면에서 실제로 칼에 손을 찍혀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픔을 참고 공연한 일, 공연 중 급성 A형 간염에 걸려 두 달간 입원하라는 권유에도 끝까지 무대에 섰던 기억….
▼단 보름간 연습만으로 공연 성공 ▼
이제 내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어버렸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난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여동생과 함께 노래를 배웠지만 실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뮤지컬을 통해 진정한 나만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내게 날개가 되어준 티엥 왕비와 명성황후. 나를 날게 해준 이들을 딛고 새로운 곳으로 날아가야 하리라.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어 넣어주는 그런 날갯짓으로 살아가고 싶다.
▼약력 ▼
1966년 생. 가족과 함께 미국 일리노이주로 이민(1981년).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대 성악과 및 동 대학원 졸업(1992년).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 왕비 역에 캐스팅(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주연(1997년). 사회풍자 뮤지컬 ‘유린타운’ 출연(2002년). 자전 에세이 ‘나는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다’(넥서스·2003년) 출간.
이태원 뮤지컬 배우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