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취임 3일 만에 본부장급 임원을 전원 교체한 정 사장의 인사에 대해 “혁명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인사이며 공기관을 사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80세의 원로 철학자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지 이사장이 왜 동도 트지 않은 오전 3시에 “가슴이 떨려서 글을 이어갈 수 없다”는 심정으로 편지를 써야 했을까.
지 이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지 이사장은 “KBS 내부보다는 정부의 앞날과 관련된 문제”라고 말한 뒤 KBS 사장 인선 과정에 있었던 ‘웃을 수도 없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번 사장 선임 과정에서 청와대 내부 양쪽 라인에서 연락이 왔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의견 통일이 안 된 것이다. 여당에서는 또 다른 인사를 추천하며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는 제의를 해 왔으나 응하지 않았다.”
지 이사장의 말대로라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앞으로 방송사엔 전화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언론 근처엔 얼씬거리지 말아야겠다”고 했지만 청와대 참모와 여당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로비를 한 셈이다.
지 이사장은 “최종 후보로 오른 두 분 다 어차피 청와대에서 추천한 사람들 아니냐. 같은 세력 내부에서도 서로 자기편을 심으려 하고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바로 경쟁자를 내치는 것을 보니까 이 정부가 왜 ‘소수파 정권’이란 소리를 듣는지 알겠다”며 걱정했다.
지 이사장은 60년대 고 장준하씨 밑에서 월간지 ‘사상계’를 이끌며 한일수교회담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논리를 펼쳤다. 평생을 냉전과 반인권을 고발하는 데 앞장서온 지성인으로 평가받은 지 이사장은 새 정부 출범 당시 노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은 “노 당선자가 평소부터 대단히 존경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지 이사장은 이날 “이제 KBS 이사회의 임기가 만료되면 현 정부와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새 정부가 새로운 풍토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는데 국정을 소수의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함께하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부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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