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기괴한 사랑 표현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화답한다.
“당신 눈알을 파서 빨아먹고 싶어요.”
이 무슨 엽기적인 애정 고백인가. 이렇게 해괴망측한 대화는 8일 개봉된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Punch-Drunk Love)'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 운명적 사랑의 상대임을 알아보는 절정의 순간에 등장한다.
감성이 메말라버린 시대에는 ‘충격 요법’이 필요한 것일까. 기괴하고 ‘비정상’적인 행위들이 사랑의 지극한 표현으로 묘사되는 희한한 멜로 영화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금 상영중인 ‘그녀에게 (Talk To Her)’에서 식물인간이 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간호사의 애정 표현은 ‘정상’의 눈에는 명백한 성폭행으로 보이지만, 영화에서는 여자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사랑의 기적으로 묘사된다.
23일 개봉될 ‘파 프롬 헤븐 (Far From Heaven)'에서 완벽해보이던 백인 중산층 가정의 남편은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 부인은 흑인 정원사에게 사랑을 느낀다. 영화의 시대배경인 50년대에 ‘비정상’으로 간주되던 소재들이 영화 속에서 ‘정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세 영화는 모두 소재가 대중적이지 않은데도 ‘비주류’의 한계를 뛰어넘어 주류 무대의 찬사를 받았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탔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녀에게’를 2002년 최고의 영화로 뽑았다. ‘파 프롬 헤븐’은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다.
토드 헤인즈 (파 프롬 헤븐),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등 감독들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들로 주로 비주류적 감성의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것도 특색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한정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했던 그들의 영화들이 멜로 장르로 진출하면서 기괴하지만 진정어린 사랑 이야기가 비주류와 주류의 화해지점을 발견해냈다”고 평가했다.
이 영화들은 감정을 의도적으로 과잉 연출한데다, 사실적이지 않고 정교하게 조작된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감정의 고조를 위해 ‘그녀에게’는 눈물어린 얼굴이 수시로 클로즈업되고 피나 바우쉬의 춤이 쓰였으며 ‘펀치 드렁크 러브’의 키스 장면에서는 주변이 온통 그림자로 사그라진다. ‘파 프롬 헤븐’에서는 장식적 색채와 카메라의 과장된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여자, ‘그녀에게’의 남자는 상대방을 조건없이 운명적으로 사랑하며 기적적인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미국 연극학자 대니얼 멘델손은 올해 초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이처럼 감정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는 멜로 영화들의 부활에 대해 “TV앵커들이 영웅, 악당, 적의 무리처럼 몇년전만 해도 비웃음을 자아냈을 단어들을 정색하고 읊조리는 시대적 정황과 궤를 같이 한다”고 분석했다.
멘델손에 따르면 정통 드라마의 효시라 할 고전 비극은 민주주의의 장르다. 유효한 여러 대안들,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들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감정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감정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멜로드라마의 득세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쇠퇴의 징표처럼 간주되어 왔다. 아테네를 비롯해 민주주의가 번성한 고대 도시국가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절제된 연극이 환영받은 반면, 도시국가의 쇠퇴기에는 정념(情念)의 가공할 작용을 주제로 한 유리피데스의 작품들이 더 인기를 끌었다. 결국 기묘한 모티브들을 통해 감정의 고양, 사랑의 절정을 추구하는 요즘의 멜로영화들은 다양한 대안이 선과 악의 대결로 축소되고 감정이 고갈된 시대에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사적인 오락’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는
어릴 때부터 일곱 명의 누나들로부터 ‘게이 소년’이라는 놀림을 받고 자란 배리 (아담 샌들러)는 사회적 의사소통이나 감정 조절에 무능력하다. 성격은 병적으로 소심하며, 물건을 구입하면 생기는 비행 마일리지 때문에 먹지도 않는 푸딩을 강박적으로 사모은다. 그런 배리가 레나(에밀리 왓슨)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레나를 만나기 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폰 섹스 업체에 전화를 걸었던 일이 화근이 돼 사기꾼인 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일당에게 시달린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고 기형적 인간관계에 시달리던 배리가 기습적으로 찾아온 사랑의 힘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경쾌한 톤으로 그렸다. 감독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로 천재감독이라는 말을 들으며 이름을 알린 폴 토마스 앤더슨. 원제는 한 방 맞은 것처럼 아찔하게 빠져든 사랑이라는 뜻. 15세 이상 관람가.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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