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렇다. 요즘 ‘로또’ 모델 송강호만한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최근 그가 주연한 영화 ‘살인의 추억’은 개봉 2주 만에 전국 관객 200만명을 넘어섰고 개봉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지만 서울 관객수 100만명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마케팅을 맡은 CJ엔터테인먼트측은 “개봉 2주째 들면서 입소문 덕에 관객과 개봉 극장수가 늘었다. ‘매트릭스’ 개봉이 변수지만 500만명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영화 전문 월간지 ‘스크린’ 5월호는 영화산업 규모가 커진 1998년 이후 송강호가 편당 관객수 및 전체 관객수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는 조사결과를 실었다. 한석규 이성재 차승원 등 다른 경쟁 배우들이 부문별로 편차가 심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결과는 송강호가 만든 ‘흥행의 추억’들이 남다른 것으로, 그가 주연을 맡으면 서울에서만 안정적으로 100만명 동원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 사이 김해에서 무작정 상경했던 이 경상도 사나이의 편당 출연료는 30배로 뛰었고 CF모델료는 3억∼4억원을 호가하게 되었다.
◇ 사람 중심 영화 선택 배우 역량 마음껏 발휘
톱스타들의 몸값이 영화제작비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이지만 시장 원리상 송강호의 출연료 상승을 논리적으로 타박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같은 영화시장에서 개봉작마다 서울 관객 100만명을 끌어모은다는 것은 복권 당첨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전문지 ‘씨네21’의 조사에서 거대 영화제작사, 재벌 배급사 대표들에 이어 배우로는 유일하게 송강호가 ‘2003년 충무로를 움직이는 10인’ 안에 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혈혈단신’인 그가 한국 영화산업에서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된 것은 한마디로 출연 영화를 선택하는 그의 안목이 탁월했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그는 특수효과와 로케 등으로 제작비 100억원 시대가 열렸음에도 언제나 이야기와 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공업적인 영화를 골랐다. 소위 ‘대박’이 터져야만 하는 초대형 기획보다는 배우로서 연기할 맛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중간 규모의 영화를 선택해온 것이다.
송강호는 스스로 “미래지향적인 느낌보다 과거지향적인 영화가 좋다. 스타일이 뛰어난 것도 싫고, 공상과학 영화가 가장 싫다. 연극을 해서 그런지 사람 중심의 영화가 좋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살인의 추억’은 연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조용한 가족’ ‘복수는 나의 것’ ‘반칙왕’은 연극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제작한 명필름의 심보경 이사는 “한석규씨가 기획자의 입장에서 꼼꼼하게 영화를 살피는 편이라면 송강호씨는 무엇보다 배우의 입장, 감독과의 소통 가능성이란 면에서 영화를 보는 쪽”이라고 말한다.
그가 얼마나 연기에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일화는 너무 많다. 그의 첫번째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넘버 3’ 캐스팅 과정에 참여했던 시네마서비스 김인수 전무는 “연기 잘하는 한석규, 최민식씨가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가 있다’고 추천해 기대는 했지만, 그가 리허설에서 3류 조폭두목 조필 역을 연기했을 때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조필과 랭보, 보스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영화사의 제의에 송강호는 부인과 상의했다며 “신인에게는 너무 큰 역이란 걸 알지만 조필을 선택하겠다”고 조심스레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는 이미 조필 역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던 것 같았어요.”
‘반칙왕’을 만든 영화사 봄의 전준희 실장은 “송강호씨는 괴물”이라고 한다.
“샐러리맨이 레슬링을 하게 되는 이야기니까, 레슬링을 너무 잘할 필요도 없고, 영화는 카메라 트릭을 써도 되잖아요. 평생 운동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레슬링을 배워 스턴트맨 없이 그걸 다 찍는 걸 보고 무술감독이 ‘송강호는 인간도 아니다’고 했으니까요.”
◇ 성격 다른 작품 …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
한 영화 관계자는 “영화 한 편만 뜨면 배우들은 유혹이 많아진다. 연예계, 스포츠계 친구들이 생기고 술자리도 많아지고 스캔들도 생긴다. 송강호는 그런 세계에서 스스로를 차단한 사람 같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영화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연기하는 재주밖에 없는 ‘곰’인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의 시위에 참여했으며, 인터뷰할 때 스스로 단어 하나 하나를 따져본 뒤 말하고 한자리에서 4, 5건의 인터뷰를 하면서도 홍보담당자보다 꼼꼼히 질문과 답변을 기억하기로 유명하다. 방송출연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하는 말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이미지를 파는 수동적인 스타의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고 출연을 제한하고-광고주는 고정된 이미지를 원한다-작품마다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영화를 고른 것도 관객층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충무로에 물밀듯이 들어왔던 투자자들이 대형영화에 투자했다가 쓴맛을 보고 하나 둘씩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영화들을 보면 그가 한국 영화산업의 생리와 한계를 매우 잘 읽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할리우드 영화의 눈높이를 가진 관객들에게 70억, 100억원짜리 영화의 특수효과란 홍보 문구 외에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는 폭증한 제작비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배우에게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배우들의 개런티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분 개념’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미 몇몇 영화에서 ‘미니멈 개런티’를 시행하긴 했지만 송강호의 ‘지분 개념’은 배우가 제작자, 감독과 함께 대등한 문제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송강호의 흥행 파워로 볼 때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관심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
송강호가 연기 외에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는 천생 연기자인지, 배우라는 상품이 팔리는 시장의 메커니즘을 잘 읽는 승부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송강호도 자신을 어느 한쪽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모 술광고에 나오듯 속 편하고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히려 ‘살인의 추억’에서 눈빛과 발품만으로 범인을 잡던 ‘무당눈깔’ 박두만 형사가 서울 형사의 말을 빌려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연기자, 그리고 충무로의 파워맨으로 변화한 송강호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 속에선 실패했지만 현실에서 그는 ‘죽도록 잡고 싶었던 것’을 이미 잡은 것이 아닐까.
김민경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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