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가친척 중 유일하게 교회에 안 가고 어머니의 증언대로 술 잘 먹는 주정뱅이였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는 아버지는 엄청 ‘나이스’한 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아버지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그 긴 세월 동안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필름은 거의 한 장면만 남아 있다. 병석에 눕던 날부터 아랫목 벽에는 빨간 크레용으로 쓴 ‘금연’ 쪽지가 붙어 있고 머리맡에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세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옆 색깔이 빨간 성경책과 흰색 요강과 초록색 오줌깡통이 그것이다.
병석에 눕기 전 아버지는 한없이 웃기는 분이었다. 열 살쯤 된 내게 화투를 가르쳐주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의무적으로 아버지와 한 판 쳐야 했다.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과 친구들의 대장격으로 온갖 재미있는 놀이를 전수해 주었다. 말 꼬리털을 길게 이어 1원짜리 한 장을 붙여 담 밖으로 보낸 뒤 행인들이 돈을 집으려 할 때 끌어당기는 놀이 등이다.
아버지는 부업으로 목수를 하셨는데 내가 옆에서 톱질이나 대패질을 따라하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놀멘 놀멘 하라우.” 놀면서 놀면서 천천히 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내가 쓴 최초의 책 제목이 ‘놀멘 놀멘’이다.
말씀은 안 했어도 아버지가 날 좋아하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나 혼자 서울 친척집에서 살았다. 방학 때마다 충남 삽다리의 시골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랜만에 아들을 본 아버지는 한 마디도 없이 얼굴만 홍당무처럼 붉어지는 것으로 애정을 표시했다.
아버지가 좋은 남자였다는 사실은 부인 김정신 권사를 봐도 알 수 있다. 김 권사는 아홉 자식을 나았는데 아버지가 좋은 남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게 가능했겠는가.
또 있다. 김 권사는 남편의 대소변을 가리는 시중을 들며 “아이고! 이 영감 칵 뒈지지도 않고”를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런데 성묘를 가면 해가 저물도록 아버지 무덤에서 일어날 줄 모르던 이가 바로 김 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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