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林權澤·67) 감독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감독들도 저마다 색깔이 다르다. 그 밑에서 조감독을 했던 멜로의 곽지균(겨울 나그네), 액션의 김영빈(김의 전쟁), 리얼리즘의 김홍준(장미빛 인생), 드라마의 김대승(번지점프를 하다)이나, 연출부를 거친 김의석(결혼이야기) 임상수(처녀들의 저녁식사)는 한 감독 아래에 있었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과 형식면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내놓으며 성장하고 있다.
“임 감독님 아래 들어가 뭔가를 배워 가겠다고 작정하면 아무것도 못 배워요. 차라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묵묵한 일꾼이 되면 스스로 깨치는 게 생깁니다.”
김홍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미국에서 영화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와 서른다섯의 나이에 임 감독의 연출부 소품 담당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구회영’이란 필명으로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영화입문서까지 낸 뒤였다.
김 교수는 임 감독에게서 아직도 깨치지 못한 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제작진 모두에게 작품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작품을 찍고 있다’는 자기 최면에 걸리게 하는 것.
임 감독의 사람 쓰기는 제작진 선정과 발탁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인물에서 두드러진다. 철학자 김용옥, 소설가 한승원, 연극연출가 이윤택, 국악인 김명곤 등을 시나리오 작업에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임 감독이다.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감독으로 데뷔한 송능한(넘버3) 육상효(아이언팜) 등도 그를 통해 발탁됐다.
“내가 무모한 데가 많아요. 일단 저지르고 보지. 시나리오를 맡길 때가 특히 그런데 매번 다르게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 때문이오. 시나리오는 영화의 골격인데 그걸 매번 같은 목수에게 맡기면 집이 비슷비슷해지지 않겠소.”
임 감독의 사람 쓰기는 소위 ‘임권택 사단’이라 할 만큼 그와 오랫동안 작업을 같이 해 온 파트너들에게서도 엿보인다. 너무도 유명해진 제작자 이태원과 촬영감독 정일성 말고도 편집의 박순덕(12편), 미술의 김유준(16편), 음악의 신병하(7편) 김영동(4편) 김수철(4편) 등이 그들이다.
“내가 그들하고 계속 작업을 하는 이유는 단지 편해서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작품마다 뭔가 새롭고 창의적인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에요. 한 작품을 찍고 다음 작품을 찍을 때 그들이 뭔가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없는 거요.”
임 감독은 대기만성형이다. 60년대에는 유현목, 신상옥, 김수용, 이만희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렸고, 70년대에는 변장호, 이두용, 김호선 등의 재기(才氣)에 밀렸다. 유신시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하길종의 뒤를 이어 펼쳐진 80년대는 이장호와 배창호의 시대였다. 그때까지도 흥행이나 명성에서 임 감독은 그들을 앞서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평가다.
평단에서 임 감독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선우휘 원작 반공소설을 영화화한 ‘깃발 없는 기수’ 이후부터다. 그러나 임 감독은 동시대 감독 중 거의 유일하게 공백기간 한번 없이 현역을 지켰고, 당대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성취에는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을 터다. 1년에 예닐곱 편씩 영화를 찍어내야 했던 양적인 축적을 질적인 변화로 끌어낸 장인정신, 흥행과 예술의 양날을 오가며 쌓은 균형감각, 자신만의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치열하게 지켜온 작가정신 등이 그런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임 감독 자신은 부단한 실험정신을 꼽는다. 파계승의 구도를 다룬 ‘만다라’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산가족 해후의 후유증을 다룬 ‘길소뜸’, 액션영화에도 미학이 있음을 보여준 ‘장군의 아들’, 판소리를 영상과 접목시킨 ‘서편제’와 ‘춘향뎐’ 등을 보면 그의 실험정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실험정신과 창의성이 인재를 알아보고 기용하는 데도 적용됐으며 그 것이 오늘의 임권택을 만드는 데 일조했음을 부인하는 영화인은 없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