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완석-심영섭 한 영화 두 소리]'싱글즈'를 보고

  • 입력 2003년 7월 16일 16시 39분


영화평론가 심영섭씨와 남완석 교수(전주우석대 영화과)가 이달에는 29세 ‘싱글’들의 일과 사랑, 꿈과 불안을 다룬 영화 ‘싱글즈’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남완석=‘싱글즈’가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해? 내 생각엔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갖는 판타지가 두드러진 영화 같아. 두 명의 남자를 봐. 동미(엄정화)와 동거하는 정준(이범수)이나 나난(장진영)과 연애하는 수헌(김주혁)은 2003년을 사는 젊은 여성들이 꿈꾸는 남성상을 대변해. 현실에선 그런 남자들이 드물지. 예전엔 가정적이고 죽어서도 여자를 못잊는 ‘편지’의 남성상이 이상적이었지만, 지금은 여자들의 사적 영역과 일을 존중하고, 사랑이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조차 기다려주는 남자들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봐.

심영섭=그렇지만 여성의 심리를 정확히 반영하는 대목이 많아. 예컨대 헤어진 남자를 다시 만난 여자가 섹시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심리 같은 거. 나도 예전에 헤어진 남자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하필 임신 중이었어. 그럴 때 얼마나 죽고 싶어지는지 알아? 난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면서 저건 ‘총각들의 저녁식사’다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거기서처럼 여자들은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구랑 어떻게 잤다, 그런 대화는 안해. 오히려 자고 난 다음의 감정이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많이 나누려고 하지. ‘싱글즈’는 그런 여자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어.

남완석

남=하지만 나난이 헤어진 남자 앞에서 얼떨결에 “어서 오세요”하고 말하는 식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여성심리조차 코미디적 용도를 위해 도구화하고 있잖아. 문제제기는 심각한데 영화는 너무 가벼워. 그 또래에 남자에게 배신당하는 일 같은 건 세상이 ‘뽀개지는’ 것 같은 일이잖아. 그런 고통을 전체적으로 희화화했어.

심=그건 상업영화의 전략인 거지.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쓰지 않는다면 주제가 버겁잖아. 이 영화를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비교해 봐도 재미있어.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낮엔 애인과 동거생활, 밤엔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일부일처제를 깨지 않는 여성들의 판타지와 이기적 욕망을 그렸지. 그런데 ‘싱글즈’는 그보다 훨씬 더 대안적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미혼모를 선택한 동미에게 나난이 “내가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고 하잖아. 한국영화에선 드문 전통이지. 여자들이 연대해 애도 낳고, 남자의 존재 자체가 모든 것을 거는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옵션 정도로 다뤄지는 것도 좋았어.

남=그거는 영화의 힘이라기보다 원작인 일본소설 ‘29세의 크리스마스’ 덕택 아냐? 내용은 급진적이지. 하지만 영화적 연출은 관습적이야. 로맨틱 코미디의 일반적 연출기법이 너무 반성 없이 사용되었다고. 예를 들면 연인들이 키스하는 장면에서 보통 카메라를 360도로 빙빙 돌리고들 하잖아. 이 영화에서도 “이럴 땐 영화에서 카메라 빙빙 돌리고 그러지?”하고 농담을 하면서도 여전히 카메라를 돌리지. 언어와 이미지를 충돌시켜서 희극적 효과를 얻으려는 거지. 그런 기법도 관습적이야.

심영섭

심=뛰어난 연출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가끔 마음에 드는 장면도 있던데. 나난의 옥탑방 앞에서 나난과 수헌이 키스하는 장면은 스틸 사진을 찍는 것처럼 직사각형의 롱숏으로 포착했는데 그때만큼은 두 사람의 감정을 담으려는 듯 카메라가 침착하더라.

남=세트도 너무 팬시해. 나난의 옥탑방 현관 앞의 나무 벤치, 차양, 그런 걸 보면 옥탑방치고 너무 팬시해서 현실감이 없어.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의 옥탑방과 비교하면 궁전이지.

심=나난의 헤어스타일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의 주인공 머리랑 똑같잖아. ‘싱글즈’는 꼭 ‘아멜리에’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쓰는 것 같은 영화야. 내용은 브리짓 존스인데 머리모양과 화자(話者)는 아멜리에지.

남=여성 1인칭 화자가 나오는 한국영화가 드물고, 감독은 ‘아멜리에’의 분위기를 가져가려 했던 것 같은데 영상은 전혀 그에 미치질 못했어.

심=그렇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영상이 튀면 얼마나 튈 수 있겠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영상이 튀냐고. 나는 오히려 감독이 더 차분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며 연출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남=난 궁금한 게, 동미가 살 곳이 없으면 나난이랑 살면 되지 왜 남자친구인 정준네 집에 들어가? 나난이랑 동미가 처음부터 함께 살면 되잖아. 나난이 옛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든지 그러면 이해가 되는데 그런 언급도 전혀 없고 내러티브상의 허점처럼 보여. 이 영화가 가부장제 가족을 넘어서서 여성끼리 대안적 가족의 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을 제시하는 진보적 측면이 있긴 한데,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서 레즈비언적 관계를 그려내면 좋았을텐데, 그런 거는 왜 못하지? 앞으로 그런 영화들도 나왔으면 좋겠어.

심=근데 이 영화는 연기자들의 연기가 중심이 되는 캐릭터 영화라는 측면도 있는데 연기는 어땠어?

남=제일 재미있는 캐릭터는 수헌이었어. 처음엔 응큼해 보이고 썰렁하기도 하고 그런데 점점 괜찮아지는 남자잖아.

심=딱 자기 같은 남자에게만 관심을 가졌었네. 엄정화가 눈에 안보였단 말야? 난 엄정화란 배우가 참 좋아. 그 여자가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를 시대가 감당하지 못하는 배우들이 있잖아. 도금봉, 김혜정, 김추자가 그랬지. 엄정화도 그런 케이스야. 시대가 그녀가 갖고 있는 도발성, 섹슈얼리티를 감당 못해서 자꾸 이미지를 편협하게 규정하려고 하는데, 엄정화는 그 틈을 뚫는 것 같아. 몸이 관능적이라는 느낌을 뛰어넘어서 당당한 표정이 섹시하게 느껴질 만큼 많이 성장했어. 내가 관능적이라고 느끼는 배우는 이미숙인데, 이미숙이 차가운 관능을 갖고 있다면 엄정화의 것은 뜨거운 관능이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보다 긍정적으로 진보한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반갑더라.

남=근데 29세 젊은 여성들의 꿈과 판타지를 보여주는 영화는 나왔는데 29세 젊은 남자들의 꿈과 불안을 그린 영화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심=왜냐하면 걔네들은 ‘아메리칸 파이’나 보고 있거든. ‘김밥부인 옆구리 터졌네’나 보고 있고. 29세 남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보러 오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거지.

정리=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토론 끝의 농담▼

‘싱글즈’에 대한 토론 끝에 부부는 자신들의 결혼 전 3개월간의 동거를 화제로 삼았다.

심=우리, 동거할 때가 제일 좋지 않았어?

남=그때 웃겼던 건, 양가에서 동거를 묵인하면서도 상대방을 유령처럼 대했다는 거야. 내가 전화를 받으면 말없이 끊고. 그래도 주변에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 그런데 ‘싱글즈’에 나오는 질문을 너한테 해볼게. 내가 한달에 1000만원씩 벌어다주면 일을 계속 할 거야? 집에서 쉴 거야?

심=황홀한 질문이네.(웃음) 평생 한번도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한참 생각해 보더니) 음…, 그래도 남편이 벌어다주는 1000만원보다 내가 버는 100만원이 나을 거 같은데? 근데 나는 만약 다시 ‘싱글’이 되면 절대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랑 같이 살 거야. 어떻게 생각해?

남=대찬성이야. 다른 놈이랑 사는 거보다는 그게 백배 낫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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