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피플]임권택 감독 "시나리오는 없다…인생이 그렇듯"

  • 입력 2003년 11월 18일 17시 47분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을 찍느라 경기 부천시의 오픈세트에서 살다시피 한다.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황폐한 시대에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원대연기자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을 찍느라 경기 부천시의 오픈세트에서 살다시피 한다.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황폐한 시대에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원대연기자
‘하류인생(下流人生)’.

지난해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해 한국 영화계의 오랜 숙원을 푼 임권택 감독이 지금 연출중인 작품이다. 19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후 99번째 작품. 14일 오후 5시 경기 부천시 부천판타스틱스튜디오에 있는 ‘하류인생’ 오픈 세트에서 그를 만났다. 감독상 수상이후 그가 자신의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씨 음악 맡아

“‘춘향뎐’ ‘취화선’ 찍다가 ‘하류인생’이라. 거기(프랑스 칸영화제)도 놀랄 거요. 그쪽 반응이 궁금해요.”

‘하류인생’은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까지를 배경으로 한 건달의 삶을 다룬 작품. 책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태웅이 주인공이다. 4·19와 5·16 등 현대사에는 무관심한 인물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격랑에 휩쓸린다. 영화 ‘춘향뎐’ ‘클래식’의 조승우가 태웅으로, 드라마 ‘유리구두’의 김민선이 엄마처럼 누나처럼 태웅의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혜옥으로 출연한다.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이 30여년만에 영화음악을 맡은 점도 화제다.

흥미로운 것은 태웅의 캐릭터나 작품의 주요 설정이 임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제작사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 등 ‘거장 트리오’의 그것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점이다. 극중극으로 ‘하류인생’이란 영화가 제작되는가 하면 태웅은 건달생활에 이어 군납업, 영화제작에 뛰어든다.

“시대에 휩쓸려 순수한 인성(人性)에 때가 묻어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망가지는 삶을 담고 싶었어요. 우리 셋, 모두 그 시대를 ‘살아냈죠’. 무슨 픽션을 하기보다는 우리와 주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온 시대를 형상화할 생각을 했어요.” (임권택 감독)

○‘장군의 아들’ 아류작 소문은 오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적게 공개한 탓에 생긴 오해다. 액션 분량이 30%정도 되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나라의 권력을 힘으로 뺏는 것도 삼류, 하류 아니요. 주인공 뿐 아니라 당시 우리 모두가 송두리째 3류로 살았던 것 아닌가 생각해요. 액션보다는 그 황폐한 시대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영화요.”

○100이라는 숫자가 나를 미치게 해

내친 김에 100번째 영화에 대해 물었다.

그는 “100번째라는 숫자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잡초’(73년)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데뷔작’으로 꼽는다. 51번째 작품이자 처음으로 제작을 겸한 영화였다.

“결혼 전까지 그냥 살았어요.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 다행 아니냐 생각한거요. 허투루 산거지. 돈 생기면 소주 마시고 떨어지면 말고. 좋은 영화를 찍어서 남겨야 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생활의 방편으로 그냥 찍은 거야. 앞에 50편은 정말 그랬어. 그러니 오히려 100이라는 숫자가 나를 미치게 하는 거요.”

도공(陶工) 이야기일까? 그는 ‘취화선’ 이전부터 도공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취재도 하고 가마 옆에서 밤도 새웠죠. 그런데 아직 자신이 없어요. 100번째일지 몰라도, 부담 없을 때 꼭 한번 만들고 싶어요.”

○끝까지 만족 못하고 그러다 끝나는 거지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으니 뭔가 이뤘지 않았느냐고 해요. 하지만 내가 이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다만 칸 영화제는 내 짐 뿐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짐이었기 때문에 홀가분한 느낌이었어요.”

‘하류인생’은 시나리오가 따로 없다. 배우들은 매일 오전 그날 연기할 내용이 담긴 자료를 받는다. 마지막까지 최상의 그림을 만들겠다는 그의 욕심 때문이다.

“큰 틀은 있어요. 하지만 디테일한 내용까지 담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배우나 감독이 거기에 갇혀요. 분명 더 좋고, 더 농밀한 표현이 있어요. 그러니까 매일매일 미치는 거요.”

‘거장 트리오’가 83년 ‘비구니’로 처음 만난지 20년이 됐다고 귀띔하니 그는 “징허요”라며 “나이와 숫자를 언급하지 않는 게 진짜 선물”이라고 했다.

오후 8시 어둠이 깔린 ‘하류인생’ 세트장. 임 감독의 ‘레디고!’, 큐 사인이 마침내 떨어졌다.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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