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 문제는 과거 한국영화에서는 흔치 않은 소재였다. 성장시대에 실업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출세하기 위해 눈물 흘리는 샐러리맨의 애환과 비애를 담은 스토리는 흔히 볼 수 있었지만(‘성공시대’ 등) 실업자에 대한 얘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최근 영화나 TV에서 이른바 ‘백수’ ‘백조’들이 ‘당당히’ 자리잡게 된 건 그만큼 실업 상황이 심각하다는 말일 것이다.
이 같은 실업문제는 물론 최근의 경기침체에 따른 것이지만 이 문제가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은 경기의 호·불황에 국한된 것이 아닌, 좀더 근본적인 요인이 실업문제에 숨어 있다는 데 있다. 즉 경제구조가 서구화할수록 실업률이 높아지고 있고, 경제성장과 일자리가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미래사회는 구조적인 만성실업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리프킨은 “과거에는 신기술이 특정 부문의 노동자를 대체하면 대체된 노동력을 흡수하는 새로운 부문이 항상 출현해왔다”면서 “그러나 오늘날에는 농업·제조업·서비스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의 전 부문이 기술의 대체를 경험하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일부 부문이 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보통신기술 혁명의 와중에서 해고될 수억명 중 단지 일부라도 흡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신기술이 인간노동을 영구적으로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은 비극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미래의 인류는 첨단기술 세계를 지배하는 극소수 엘리트 집단과 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거대한 실업자 집단으로 나뉘어 파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게 그의 미래사회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다.
산업혁명기에 노동자들이 “기계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며 기계를 때려부쉈다. 당시 노동자들의 공포와 불안은 벼랑 끝으로 몰려 절박한 이들의 그것이었다. 앞서 얘기한 작가 디킨스의 작품들-올리버 트위스트 등-에는 ‘러다이트’로 불린 이 기계파괴운동이 벌어지던 산업혁명 당시 런던의 비참한 노동자 및 실업자들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리프킨의 경고에 비춰보면 러다이트 운동은 과거형이 아닌 오히려 미래의 묵시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리프킨의 예언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은 아닐까. 러다이트 운동은 결국 오해로 빚어진 해프닝이었음이 드러났고,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최근의 급류에 저항하는 많은 이들은 세계화란 결국 ‘일자리 없는 성장’에 그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고 이러한 전망을 가능케 하는 많은 방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불확실한 미래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모범답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모두가 열심히 노력해서 뛰어난 프로페셔널이 되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에선 ‘개인의 브랜드화’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새로운 종교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결국 철저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용케 그 대열에 합류한 소수는 살아남겠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의 낙오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게다가 소수에 끼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제3부문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연대와 봉사정신에 입각한 사회적 경제를 가리킨다. 일부에선 무한경쟁의 세계화에 맞선 ‘자급적 체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대안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구상이라고 쉽게 매도당하지만 어쩌면 단순한 현실론이야말로 현실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진짜 현실을 걱정하는’ 대안들이 다양하게 제시될 때만이 이 땅의 ‘백수’ ‘백조’들의 미래를 위한 ‘위대한 유산’이 될 것이다.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주간동아 제414호)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