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밤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한 호프집에서 그를 만났다. 영화 ‘태백산맥’ ‘똥개’ 등으로 두터운 중장년 팬들을 갖고 있는 김갑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서민적 풍모를 물씬 풍겼다. 주변에서 맥주를 마시던 샐러리맨들도 다가와 사인과 동반 촬영을 요청했다. 김갑수는 “나는 젊은층보다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걸리면 한동안 놓여나기 힘들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동안 대하 사극에서 권력자를 보필하는 2인자 역할을 해왔다. 불같은 성격의 카리스마를 갖춘 절대 권력자 역은 이번이 처음. 그에게 “(궁예를 연기했던) 김영철씨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김갑수는 “나는 나만의 카리스마가 있다”며 “김영철 선배가 선 굵게 인물을 풀어간다면, 나는 조금씩 인물을 완성해가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고려의 최충헌(1149∼1219)은 십수 년 동안 절치부심한 끝에 최고 권력을 잡은 야심가. 권력을 위해 왕을 네 번씩이나 바꾸고, 동생과 처조카까지 죽일 만큼 잔인하고 단호한 인물이다.
신창석 PD는 “김갑수씨의 눈은 한없이 정의롭다가도 순간적으로 섬뜩해질 만큼 ‘천의 눈빛’을 가졌다”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야심가이자 지략과 책략에 능한 최충헌 역에 적임”이라고 말했다.
김갑수는 ‘무인시대’에서 처절하게 권력 다툼을 벌이는 무인들이 제각각의 대의명분을 잃지 않아야 하며 인물 간 성격도 뚜렷하게 대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가 강조하는 게 작가와 배우, 연출자간의 의사소통.
“‘태조 왕건’ 때 이환경 작가가 ‘종간은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묻더군요. 어차피 기록이 없으니까 원하는 죽음을 말해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궁예 일행이 모두 떠난 뒤 궁궐 앞마당에서 왕건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죽고 싶다고 했지요. 결국 방안에서 죽는 것으로 처리됐지만 작가와 배우가 서로 의견을 나누며 드라마를 만들어나가면서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극단 ‘배우세상’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영화와 드라마 출연 사이 틈을 쪼개 지난해 말 소외계층을 위한 자선연극 ‘통북어’를 인천 과천 평창 등 전국 10개 도시에서 순회 공연했다. 그는 영화와 TV사극에서 ‘베테랑’으로 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25년의 연극 경력에서 찾았다.
“사극 연기는 발성과 호흡에 대해 기본이 없으면 시청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없습니다. 현대극은 대사를 못 외워도 연상이나 애드리브로 넘어가면 되지만, 사극은 토씨 하나만 틀려도 전체 대사가 어그러집니다. 영화에서도 ‘동시 녹음’이 도입된 뒤 발성과 호흡이 안 되는 ‘더빙 배우’가 사라지고 있어요. 연극에 단 한편도 출연하지 않은 채 영화나 TV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한국 밖에 없을 겁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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