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5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 후보(군산-옥구)로 나서 37세에 국회에 진출한 강 시장은 그해 9월 15일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8·23 난동 사건’으로 불린 실미도 사건의 실체를 추궁했다 불구의 몸이 됐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는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이 퍼래 군 관련 발언은 ‘금기사항’이었지요. 이 사건의 진상을 추궁하자 국회는 벌집 쑤신 듯 들끓었습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이 고함을 질러대 10여 차례나 질문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강 시장은 △실미도 부대의 목적 △예산 및 지휘 체계 △정치적 테러와 연관성 등 시중의 의혹을 1시간여 동안 따져 물었다.
다음날 당시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는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동자들이 군 특수부대 요원이었음을 공식 인정했다.
“자유로운 매스컴 활동으로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북한측에 알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해 얼마 동안 특수범이라고 은닉 발표한 것이 불가피했으나 이미 그 시기가 지나갔다”고 김 전 총리는 해명했다.
정부는 이 사건이 터지자 ‘무장공비들의 소행’으로 발표했다가 3시간 뒤 ‘군 특수범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정정했다.
강 시장 질의의 여파로 당시 정래혁(丁來赫) 국방부 장관이 사임하고 오치성(吳致成) 내무부 장관에 대한 각료 불신임안이 국회 사상 첫 통과된 ‘10·2 국회 파동’이 벌어졌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직후 강 시장은 계엄군에 끌려가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서 조사를 받고 국군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 서빙고분실에서 전기고문을 받았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진 강 시장은 지금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강 시장은 “대정부 질문 다음날 동아일보가 ‘8·23 난동자 특수부대원’이라는 제목으로 1면에 기사를 크게 다뤘고 17일자에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라’는 사설을 게재해 천관우(千寬宇) 주필과 기사를 쓴 기자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사설에서 정부의 정보 통제와 불신풍조 조장을 질타했던 천 주필이 그 뒤 직접 전화를 걸어 와 ‘용감한 일을 했다’고 격려해 주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회고했다.
강 시장은 “실미도 사건은 남북 분단과 냉전 논리가 빚은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이라며 “사건의 명확한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없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8대 국회의원 이후 야인 생활을 하던 강 시장은 2001년 4월 군산시장 재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나서 당선됐으며 이듬해 재선됐다. 그는 고초를 겪은 지 29년 만인 2001년 8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 투쟁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실미도 사건▼ 1968년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북한군 124군부대를 남파한 ‘1·21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는 똑같은 방식으로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기 위해 31명으로 북파공작대를 구성, 인천 앞 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시켰다. 하지만 북파 계획이 취소되고 대우마저 열악해지자 훈련 과정에서 숨진 7명을 제외한 24명이 1971년 8월 23일 실미도를 탈출했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으나 수류탄 폭파로 19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4명이 체포돼 모두 사형됐다.
군산=김광오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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