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설 연휴에 볼 만한 축제의 영화들

  • 입력 2004년 1월 16일 17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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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또는 잔치의 특징은 즐거움이다. 춤과 노래, 음식과 술이 넘쳐나며, 하나의 놀이로서 진행되는 잔치는 엄격하기보다 너그럽고, 풍요롭고, 화려하다. 수많은 영화가 축제나 잔치를 소재로 삼은 것도 축제의 속성상 관객에게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세시명절과 관혼상제, 생일파티, 서양의 성탄절, 카니발, 미국의 할로윈 등은 영화의 단골 소재다. 잔치는 일상과 대조되는 것이며 예외적인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주인공들이 몰래 모여 잔치를 벌이고 아이들처럼 놀이에 빠지는 장면들을 떠올려보라. 삶을 작은 잔치로 만들고 싶어하는 ‘호모 루덴스’의 속성이랄까.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일상을 놀이와 잔치로 만들어 보여주는 영화를 많이 만든 대표적인 감독이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많은 영화도 축제 그 자체였다.

잔치와 음식이 중요한 소재가 된 영화들 중 설 연휴에 볼 만한 작품(비디오 또는 DVD 출시작) 10편을 소개한다.

◇ 흑인 오르페 Orfeo Negro (1959, 마르셀 카뮈 감독)

프랑스 흑백 고전영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그리스신화가 이야기의 틀을 이루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화려하고 열광적인 카니발이 배경이다. 약혼녀가 있는 오르페는 에우리디케와 사랑에 빠진다. 가면 쓴 사나이에게 쫓기고 있는 그녀를 구하려다 오르페는 순간적인 실수로 그녀를 죽게 만든다. 오르페도 결국 그녀의 주검을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리우 빈민촌에서 펼쳐지는 흑인 배우들의 열정과 질투가 영화를 뜨겁게 달구고, 마지막에 관객이 주술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브라질의 삼바음악과 토속적인 리듬, 춤, 아름다운 영상이 인상적이다.

◇ 축제 (1996, 임권택 감독)

임권택 감독은 문화인류학적 가치가 느껴지는 잔치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씨받이’, ‘신궁’, ‘춘향뎐’ 등 그의 작품들에서 잔치는 매우 비중 있게 소개된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축제’는 픽션이면서도, 전통장례식에 대한 세밀하고 아름다운 기록이다.

치매를 앓다가 죽은 노모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고향에 내려간 주인공 준섭은 집안의 수치인 이복조카 용순 때문에 거북해한다. 용순은 장례식에 맞지 않는 화려한 옷과 반항적인 말투로 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장례식을 계기로 가족의 갈등은 해소되고 주인공도 용순과 화해한다. 슬픈 장례식이 모든 가족에게 행복한 축제가 된다.

◇ 음식남녀 Eat Drink Man Woman(1994, 이안 감독)

딸 셋을 홀로 키운 홀아비 주사부는 중국 전통요리의 최고 요리사다. 내성적인 노처녀로 늙어가는 고등학교 교사인 첫째 딸과,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다가 혼전임신하는 막내딸이 각각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이 코믹하고 감동적이다. 영화는 요리를 잘하는 캐리어우먼인 둘째 딸의 외로움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딸들은 아버지가 집에 자주 드나드는 금영모와 결혼할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음식이 등장하는 이 영화를 보노라면 배가 고파지고, 중국요리가 먹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맛과 향과 색이 어우러지는 요리와 달리 인생은 언제나 조화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변화하는 사회와 가족의 해체, 전통에 대한 갈등을 주제로 해 요리 과정과 신비로운 요리가 시각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Como Agua para Chocolate(1992, 알폰소 아라우 감독)

부엌데기로 자라난 띠따는 페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막내딸이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결혼하지 않고 평생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페드로는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그녀의 언니와 결혼한다. 어머니가 늘 그녀를 감시하기 때문에 띠따는 페드로를 향한 사랑을 요리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페드로가 바친 장미꽃과 메추리로 요리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둘째 언니는 이 요리를 먹고 사랑의 감정에 복받쳐 집을 나가 혁명아가 된다.

이 영화는 사랑의 행위와 감정을 요리로 표현하고, 여성의 운명을 스스로개척하라는 메시지를 동화 형식으로 풀어내는 멜로 로맨스물이다. 부엌 풍경과 결혼식 식탁, 장미꽃 요리 등 수려한 화면 속에 전통과 근대화의 갈등을 마술적 사실주의로 그려냈다.

◇ 나의 그리스식 웨딩 My Big Fat Greek Wedding(2003, 조엘 즈빅 감독)

니아 바르달로스라는 그리스 여성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은 로맨스 영화. 8달러만 지니고 미국에 이민 가 근면으로 성공한 그리스인의 딸 니아에게 부모는 ‘그리스 남자와 결혼하여 그리스 아이들을 낳고, 주변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세 가지 의무’를 강조한다. 서른 살의 니아는 연애도 못 해보고, 아버지가 주인인 ‘춤추는 조르바’ 식당에서 일한다. 어느 날 이안을 보고 반한 그녀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안이 다른 문화를 사랑의 힘으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니아의 초조함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전통문화에 공감이 가고 감동적이며, 문화적 차이를 영특한 유머로 풀어놓은 영화다.

◇ 빅 나이트 Big Night (1997, 스탠리 투치, 캠벨 스콧 감독)

미국에 온 이탈리아인 세콘도(둘째)는 형 프리모(첫째)와 이탈이아 식당을 경영한다. ‘음식 같지 않은 음식을 내놓는 놈은 감옥에 가야 한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는 형은 요리사로서 자부심이 강하지만 레스토랑은 파산 직전이다.

성공한 길 건너 식당 주인은 마지막 자구책으로 재즈 싱어인 유명인사 친구를 초대해주기로 한다. 형제는 식당의 존폐를 결정하는 재즈 싱어의 파티를 혼신의 힘을 기울여 준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리에 스스로 감탄하고, 초청객들은 생애 최고의 식사라며 눈물 흘린다. 그러나 재즈 싱어는 사실 초대받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손님들이 다 떠난 식당 주방에서 그들은 천천히 오믈렛을 나누어 먹는다. 영화는 수프, 리조토, 첫째 코스 팀파노, 둘째 코스, 후식 순으로 구성되어 시각적으로 맛있는 요리메뉴 그 자체로 펼쳐진다.

◇ 바베트의 만찬 Festin de Babette (1987, 가브리엘 악셀 감독)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 카렌 블릭센이 쓴 동화를 덴마크 감독이 영화화했다. 덴마크의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선행을 베풀며 독신으로 살아가는 두 자매가 있다. 1871년 겨울, 파리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프랑스 여자 바베트가 두 자매를 찾아온다. 보수도 받지 않고 14년 동안 자매의 가정부로 일하게 된 바베트는 어느 날 로또에 당첨돼 거액을 받는다. 바베트는 로또 당첨금을 몽땅 털어 프랑스에 포도주와 식재료를 가져오고, 정식 프랑스 요리로 마을사람들에게 만찬을 베푼다. 질시와 의심에 차 있던 마을사람들은 평화와 형제애를 되찾고, 평생 맛보지 못한 행복을 느낀다. 마을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바베트의 만찬은 바로 왕실요리였다.

◇ 집시의 시간 Dom za vesanje (1988,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

사생아인 집시 페르한은 다리를 저는 여동생과 할머니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의 변두리 빈민촌에 살고 있다. 페르한은 아즈라를 사랑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거부당한다. 로마에서 부자로 성공한 아메드가 여동생을 도시로 데려가 다리수술을 받게해 주겠다고 한다. 페르한은 성공의 꿈을 안고 그를 따라 로마로 향하지만, 아메드는 아이들에게 구걸과 도벽, 매춘을 시켜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었고, 페르한도 점차 그렇게 변해간다. 어느 날 병원에 있는 줄 알았던 여동생과 아즈라가 아메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메드에게 복수할 결심을 한다.

집시 스타일 음악이 유명한 이 영화는 잔인한 현실과 시적 서정성, 팬터지가 조화를 이룬다. 집시들의 잔치와 강물의 예식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 결혼피로연 Wedding Banquet (1993, 이안 감독)

미국 국적을 얻고 뉴욕에 사는 타이완 남자 와이 퉁은 동성애자로서 사이먼과 동거하고 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그의 부모는 그에게 빨리 결혼해 손자를 안겨주기를 강요한다. 견디다 못한 그는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그린카드가 필요한 웨이 웨이와 위장결혼을 한다.

웨이 웨이는 이를 선뜻 받아들인다. 상의도 없이 타이완에서 서둘러 날아온 부모는 상류계층 집안답게 성대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열기로 한다. 가짜 신랑 신부가 이 무사히 행사를 치르기 위해 연극을 하게 되면서 희극적 상황이 펼쳐진다. 그들은 만취 상태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웨이 웨이는 임신한다. 성적 억압과 관용, 전통과 사랑이 아우르는 유쾌한 코미디면서도 가슴 뭉클한 멜로가 섞여 있다. 중국식 결혼피로연 장면은 영화의 볼거리다.

◇ 피츠카랄도 Fitzcarraldo (1982, 베르너 헤르조크 감독)

페루에 사는 아일랜드인 피츠카랄도는 카루소가 공연하는 오페라에 열광한 나머지 아마존 깊은 곳에 오페라하우스를 만들 꿈을 꾼다. 이를 위해 그는 대형 증기선을 사서 강을 타고 오지로 들어간다. 물길이 막히자 그는 원주민과 함께 증기선을 뭍으로 끌어들여 건너편의 강으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는 원시적인 장소에 문화적인 축제를 만들어보려는 사람이 꿈꾸는 야망에 관한 영화다. 모험영화의 형식으로 문화의 차이, 백인과 원주민의 팽팽한 긴장, 그리고 그들의 조화를 보여주는 수수께끼 같은 영화다. 아마존의 풍경과 오페라와 증기선 운반 등이 장관을 이루는 걸작이다.

이명희/ 영화평론가 mhimages@hotmail.com (주간동아 4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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