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대중의 스타를 영웅으로 숭배하는 것은 발달의 한 징후다. 그것은 성인이 된 지금의 내가 ‘델리스파이스’의 팬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청소년기에 아이들은 세상이 이상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동안 길잡이였던 부모가 그렇게 완벽하고 강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실망과 환멸을 느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데 자신을 믿기엔 너무 취약한 그 시기를 채워주는 존재가 바로 스타이다. 과도기를 넘겨 성장하게 도와주는 부모의 대리인과 다름없는 것이다.
현수에게 리샤오룽은, 힘은 있으되 그 힘을 뒷받침할 정의와 약자에 대한 긍휼함이 결여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해 현수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현수는 애초에 그의 강한 친구 우식(이정진)에게서 리샤오룽의 풍모를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식이 더 강한 이에게 쫓겨나듯 학교를 떠났을 때, 현수 자신이 리샤오룽을 닮은 영웅이 되려고 시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아이들이 부모를 닮아감으로써 부모의 일부를 내 안에 내재화하여 부모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얻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시절의 영웅이었던 ‘들국화’와 저우룬파와 ‘동물원’은 대체 무엇을 대신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왔을까. 돌이켜보면 그들은 우리 부모와 어른들이 차마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목이 쉬어 질러대는 솔직한 고백, 나도 너만큼 슬프다는 ‘반(反)영웅’적 본색, 프로와 아마추어리즘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던 ‘동물원’의 아슬아슬한 감성…. 그 모든 것이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중시하던 우리 부모 세대의 정서에 살짝 브레이크를 잡아 주었고, 우리는 거기에 오마주를 바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겉모습은 어른이되 그 마음이 우리 속내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의 알 수 없는 자유가 우리를 매혹했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전인권은 늙었고, 허성욱과 김광석과 장국영은 떠났으며, 주윤발과 ‘동물원’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도 변하고, 나도 변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겐 그런 카리스마를 지닌 영웅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신선해도, 권상우와 ‘들국화’는 분명 다르다. 나는 거기에서 또 하나의 징표를 본다. 이제 모든 이에게 구심이 되는 영웅이란 필요치 않아졌다는 것,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만큼 다양하고, 굳이 거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더 이상 자유를 갈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유로운 세대, 낯설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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