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폴리스 129’로 데뷔한 그는 지난 10년간 17편의 영화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2001년과 2002년에 가장 바빴는데 두 해 모두 각각 4편의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2년 출연작은 ‘쉬핑 뉴스’ ‘반지의 제왕-두개의 탑’ ‘헤븐’ ‘베로니카 게린’이다. 다작 출연을 마다하지 않은 덕에 요즘 우리는 그의 영화를 두 편이나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베로니카 게린’과 ‘실종’이다.
‘베로니카 게린’은 어디서 상영되는지 찾느라 헤매는 사이 슬며시 없어지는 이른바 ‘사흘용 영화’(상업성이 없는 영화의 경우 2, 3일 만에 종영하는 국내 극장들의 운영 방식을 빗대는 말)’지만 알고 보면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인데다 불의에 맞서 싸우다 살해된 아일랜드의 여기자의 실제 얘기다.
‘실종’ 역시 2월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작품. 무엇보다 론 하워드의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지만 한두 편의 대작 영화가 스크린을 수백 개씩 가져가는 요즘의 극장가에서는 홀대받기 십상인 작품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아깝기 그지없다. 케이트 블란쳇의 폭넓은 연기력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엘리자베스’에 출연하면서부터. 호주 출신인 블란쳇은 엘리자베스 1세 역을 얻어냄으로써 할리우드에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랑에 빠진 감성적인 공주에서 점차 강인한 여왕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멋지게 소화해 냄으로써 평단과 제작자, 무엇보다 관객들로부터 단박에 눈길을 끌었다. ‘마치 엘리자베스 여왕이 환생한 것 같다’는 것이 당시 저널의 평가였다. 그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성적이고 강인한 이미지의 여성에서부터 가진 것 없는 미국 하층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왔다. ‘엘리자베스’를 비롯해서 최근의 ‘베로니카 게린’ ‘실종’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 레지스탕스를 연기한 ‘샬럿 그레이’ 등이 전자 쪽이라면 ‘기프트’ ‘밴디츠’ ‘쉬핑 뉴스’ 등은 후자쪽이다. ‘반지의 제왕’에서의 요정 여왕 갈라드리엘 역도 빼놓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강인한 여성 역할이 더 매혹적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영화에 한꺼번에 출연하다 보면 때론 선구안이 조금 떨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아까운 배우가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외지 평론가들이 블란쳇을 두고 전환점에 서 있다는 얘기들을 하는 이유다. ‘실종’과 ‘베로니카 게린’ 모두 27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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