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경, 제가 영화배우가 되기 전 어느 날 우연히 안성기씨가 부인 오소영씨와 서울 명동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팬이었던 저는 기쁨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가던 길을 되돌려 예전 명동 코리아극장 자리부터 충무로 청자당 빵집 앞까지 거의 2∼3km를 몰래 졸졸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이듬해인 1985년에 저도 그토록 원했던 영화배우가 됐지만 배우 안성기의 존재는 제겐 ‘떨림’이었습니다. 그 선배님과 두근거리는 공연을 할 수 있었던 행운의 기회는 1988년 박광수 감독님의 ‘칠수와 만수’라는 영화에서였습니다. 인격과 관록의 안성기 선배님은 촬영장에서 까마득한 후배를 격려하며 ‘만수’역을 훌륭히 연기해 주셨고, 저 또한 신인배우로서 ‘칠수’역을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좋아서 저의 모자람이 감춰졌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인간으로서나, 배우로서나 여러 가지로 미숙함이 떠올라 부끄러워지곤 합니다.
안성기 선배님과 배우로서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5년 뒤인 1993년 강우석 감독님의 ‘투캅스’라는 영화에서였습니다. 선배님은 5년 만에 만난, 이제는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가는 후배의 성장을 꽤나 흐뭇해했고 저 또한 선배님의 한결같은 배려로 편안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또 5년 뒤인 1998년 이명세 감독님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는 영화에서 만났을 땐 차라리 선배님이 친구 같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요새 젊은 관객들의 절대적 인기를 몰고 다니는 영화배우 차태현씨는 1997년 제가 주연한 신승수 감독님의 영화 ‘할렐루야’에서, 저에게 혼쭐나는 고등학생 역을 처음 맡으면서 영화배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워낙 역할이 작아서인지 미안하게도 그의 배우로서의 성공을 예감하지 못했는데, 이 집념의 후배는 이제 당당히 충무로에서 본인의 자리를 확실히 가진 배우로 성장하였습니다.
지금은 저와 콤비를 맞춰 박헌수 감독님의 ‘투 가이즈’라는 영화에서 공동주연으로 연기하고 있는데 단역으로 출발해 7년 만에 주연으로 만난 이 후배가 그렇게 든든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2000년 12월 동아일보 독자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헤어지며 첫 만남을 끝냈던 제가 3년이 넘게 흐른 지금 ‘속-세상 스크린’으로 재회하려 합니다. 설레고 떨리고 두렵기도 하지만 그때 받았던 독자님들의 격려와 사랑이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있기에 용기를 냈습니다. 안성기 선배가 저에게 그랬듯, 제가 차태현 후배에게 그랬듯, 저도 할 수만 있다면 수년 만에 다시 만난 독자님들을 흐뭇하게 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중훈 약력▼
△1966년 3월 22일생
△1988년 중앙대 영화과 졸업
△1992년 뉴욕대 대학원 연기교육학 석사
△1985년 영화 ‘깜보’로 데뷔. ‘투캅스 1, 2’ ‘게임의 법칙’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황산벌’ 등 30여편에 출연
△2000년 프랑스 도빌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2001년 국내 배우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찰리의 진실)에 출연
▼편집자 주▼
2000년 4월부터 12월까지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세상 읽기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배우 박중훈씨의 칼럼 ‘세상 스크린’이 속편으로 매주 수요일 다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박씨는 영화 ‘투 가이즈’의 촬영을 마친 뒤 올 여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 ‘Pepper Pot’(가제)을 찍을 예정입니다. 국내외 촬영 현장에서 박씨가 들려줄 스크린 안팎 이야기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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