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금 이미 다 나갔는데요….” (영화사)
영화 ‘바람의 전설’에서 안무를 맡은 샤리 권은 지난해 8월 캐스팅이 결정된 ‘이 배우’의 몸놀림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몸치’란 판정을 내렸다. 평발에다 리듬감도 없었다. 때는 늦었다.
이성재(34). 그는 그 뒤 ‘천대’를 딛고 무도학원에서 하루 8시간씩 3개월 동안 연습했다. 그리고 몸치의 견고한 껍질을 깨고 나왔다. 자이브, 왈츠, 룸바, 탱고, 살사 등 7가지 춤을 대역 없이 100% 소화해냈다.
“상대와 손을 맞잡고 같은 음악에 같은 스텝을 밟다 보면 나도 모르게 놀이기구를 함께 타고 두둥실 떠가는 느낌이 듭니다. 내 발이 없어진 느낌….”
○매일 8시간 춤연습 ‘몸치’ 탈출
‘선이 아름다운 남자’란 표현은 하기도 듣기도 쉽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이성재가 딱 그랬다. 그가 섹시하게 보이기는 영화 데뷔 7년 만에 처음일 것이다. 날씬한 아랫배, 꼿꼿한 허리, 요동치는 골반, 단단한 종아리의 탄력 있는 움직임이 만드는 실루엣.
“무도인과 제비는 다릅니다. 무도인은 춤이 좋아 춥니다. 제비는 실리추구를 위해 추지요. 극중 박풍식은 무도인입니다.”
4월 9일 개봉 예정인 ‘바람의 전설’에서 그는 동창 만수(김수로)의 꾐에 빠져 춤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박풍식 역을 맡았다. ‘업계’의 전설이 된 풍식은 여형사 연화(박솔미)의 집요한 추적을 받는다. 풍식의 잘못이라면, “오늘은 그냥 못가요. 나 좀 채워줘”하는 여자의 애원에 “누님이 불행해지는 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라며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는 사실 뿐.
그는 실제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촬영 전 두 차례 카바레를 찾았다. 스테이지에서 제비를 한눈에 알아봤다.
○카바레 현장실습 하다 진짜 제비 만나
“진짜 제비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지도 않았어요. 아주 살살 (상대 여성을) 돌려주면서도 접촉면적은 극대화하고 있었죠.”
이성재는 배우로서 폭이 넓고 또 좁다. 조폭 브레인(‘신라의 달밤’), 냉혈 살인마(‘공공의 적’), 무기력한 지식인(‘플란다스의 개’)으로 종횡무진 활약했지만, 그를 관통하는 어떤 분위기를 지울 순 없었다.
“진정성이랄까? 사실 그것 때문에 손해 아닌 손해를 봐왔죠. (웃음) 저보다 상대 배우가 더 부각돼 보이고, 코미디에서도 저는 줄기 역할만 하고 상대 배우가 웃기는….”
최근 그는 한 주말 인기 TV프로그램의 출연 요청을 고사했다. “방송에선 춤 안 추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 얼굴을 보세요. 단번에 주목받을 얼굴이 아닙니다. 저는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야 하는 배우죠.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면 다 이룬 것 같죠? 방송국에 들어가면 모두 차인표가 된 것 같죠? 아닙니다. 늘 더 큰 게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못 이뤄 괴롭죠.”
말단 사원에서 대표 이사(모 그룹 건설회사)까지 오른 아버지에게서 이성재는 ‘느리지만 단단하게’ 영그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고 “돈은 별로 안 들었겠다”고, ‘주유소 습격사건’을 보고 “애들은 좋아하겠다”고 촌평할 정도로 아들의 영화에 무뚝뚝했던 아버지였다.
“풍식은 일관된 캐릭터가 아니어서 고민했습니다. 결심했죠. ‘풍식이란 캐릭터에 나를 맞추지 말고, 내가 연기하는 게 바로 풍식이려니’ 하자고.”
인터뷰 말미에 이성재는 “큰딸(9)의 학교 숙제가 너무 어려워 아빠로서 도움주기가 난감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매니저도, 소속 사무실도 없는 그는 인터뷰 장소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떠났다. 오랜 만에 ‘배우’를 만난 느낌이었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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