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續세상스크린]영어로 연기한다는 것

  • 입력 2004년 4월 6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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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찰리의 진실’을 촬영할 때 가장 설♬던 것은 감독이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죠나단 드미 감독이었다는 점이지만 그 못지않게 흥분한 이유는 할리우드 스타 팀 로빈스와 공연할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올해 ‘미스틱 리버’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평소 사형을 반대하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일방주의적 외교노선에 대해 강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 미국의 대표적 지성파 진보배우입니다.

2m 가까운 키에 귀공자풍인 그는 촬영하는 5개월 내내 늘 묵묵히 독서를 하며 촬영을 기다렸고, 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씨익 웃으며 다가와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극중 그의 역이 특수요원 역을 맡은 저의 ‘대장님’ 역할이라 연기에 대한 얘기를 주로 많이 했지만, 그에게도 한국에서 날아온 토종 아시아 배우를 접한다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는지 저에게 이것저것 많이 묻기도 했습니다.

유창하진 못한 영어지만 그래도 제 전문분야인 연기에 대해 얘기할 때는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고,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얘기할 때 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잘 버텼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미국과 아시아, 나아가 작금의 세계정치로까지 얘기가 발전할 때에는 그저 과묵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말로 얘기했다면 그렇게 ‘별 생각 없는’ 사람처럼 듣고 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영어를 잘하고 못함은 단지 편함과 불편함의 문제일 뿐이지, 유 무식을 가리거나 행복의 잣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처럼 아시아 배우가 미국 할리우드에 자리 잡으려 할 때는 사실 영어가 항상 부담이고 때로는 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영자(英字) 신문을 구독하고, 또 ‘스크린 영어’가 효과적 학습방법이라는 말에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의 대본을 구해 놓고 비디오를 수없이 틀며 폴 뉴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대사를 외워보기도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영어가 잘 되고 어떤 날은 잘 안됩니다.

이 얘기를 영어에 능통한 선배에게 했더니 한국말이 월요일엔 잘 되고 토요일엔 잘 안 되냐며, 영어가 잘 되는 날은 아는 영어가 많이 나온 날이고, 안 되는 날은 모르는 영어가 많이 나와 그렇다며 예리하게 지적해 줍니다.

맞는 말인 데도 괜히 약 오릅니다. 잘 안 되는 ‘어떤 날’이 많은 입장에선 말입니다.

미국 영화 촬영할 때 대사연습을 하면서 ‘이게 모두 한국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마음속에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영어로 연기한다는 것은 단순 회화를 지나 발음, 억양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 상태에서 그 인물의 감정까지 넣어야 하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실력을 필요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왕 시작한 것, 할리우드의 아시아 남자 배우도 액션 뿐만 아니라 ‘연기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언제까지나 과묵할 순 없잖습니까?

moviejh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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