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승우(24)는 차를 몰고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중 임권택 감독(68)과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66)이 길가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얼른 차를 세우고 내려 꾸벅 인사를 했다. 2년만의 만남이었다.
“승우야, 너 태권도 좀 배워라.” (임 감독)
“예?” (조승우)
그걸로 끝이었다. 임 감독의 입에는 다시 자물쇠가 채워졌고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얼마 뒤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고 조승우는 임 감독의 99번째 작품 ‘하류인생’(21일 개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7일 서울 세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승우는 “얼핏 들은 한 마디가 캐스팅 제안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출연한 ‘클래식’의 흥행 성공으로 20여 편의 시나리오가 들어왔지만 모두 뒷전으로 밀쳐놓았다.
● 평범한 얼굴에 숨어 있는 千의 얼굴
영화 ‘하류인생’은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현대사를 배경으로 권력에 기생한 채 살아가면서 인성(人性)마저 황폐해지는 남자, 태웅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임 감독은 2000년 ‘춘향뎐’을 만들 때부터 이미 조승우의 얼굴이 지닌 매력과 배우로서의 잠재력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줬다. 그때 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뎐’ 오디션에 앞서 손바닥만한 작은 사진을 봤는데 그 안에 이 도령 얼굴만 있는 게 아니야. 또 다른 얼굴이 보여. 이번에는 이 도령이지만 다음에는 ‘주먹’이야.”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일까. 하지만 어릴 때 눈이 컸다고 ‘주장’하는 조승우의 말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풍긴다.
“평범한 얼굴입니다. 배우 얼굴은 캔버스처럼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그런 면에서 좋은 얼굴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내재된 매력이 우러나오는 정우성씨 같은 얼굴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 밟아
그는 데뷔작으로 칸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았지만 이 도령이 된 것은 큰 영광이자 고통이었다고 했다.
“차 대신 당나귀 타고, 에어컨 대신 부채질 하고, 구두 대신 고무신 신고…. ‘춘향뎐’이 끝나자 한동안 주변에서 저를 이런 눈초리로 쳐다보더군요.”
짧지 않은 슬럼프였고 시간이 필요했다. 2002년 ‘후 아 유’의 게임 기획자 형태와 ‘H’의 연쇄살인범 신현, 2003년 ‘클래식’에서 순애보의 주인공 준하를 만나고 나서야 ‘이도령’ 대신 ‘오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장이 인정한 이 젊은 배우는 ‘하류인생’에서 또 다시 독하게 변했다. 시늉이 아니라 주먹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액션은 물론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세월의 때가 묻으면서 갈수록 비루해지는 남자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액션 장면에서는 와이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쿠션이 있는 특수신발을 신고 가슴에 보호 장비를 한 채 진짜 때리고 맞았다.
● 주인공 최태웅은 임권택-이태원의 분신
극중 건달에서 발전해 영화제작과 군납 일을 하는 주인공 태웅은 임 감독과 이 사장의 분신(分身)이다. 조승우는 장면에 따라 ‘이건 감독님, 저건 사장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라는 감에 따라 ‘훈수’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태웅의 멜로에 애착을 느꼈어요. 태웅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지만 그래도 돌아갈 곳은 아내 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조승우는 아내 혜옥 역의 김민선에 대해 “크랭크인 이틀 전 모친상을 당한 김민선이 촬영장에 나타나 깜짝 놀랐다”며 “극중 혜옥처럼 김민선도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헌신적이고 강한 여성”이라고 덧붙였다.
조승우에게 ‘임 감독이 두 차례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춘향뎐’으로 생긴 어려운 ‘숙제’를 혼자 잘 풀었기 때문에 또 다른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100번째 작품에서는 카메오라도 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보여줄 게 너무 많다”는 그가 지금 꿈꾸는 것은 ‘스타’가 아니라 ‘배우’다. 조승우야말로 40여년 영화인생을 반추하면서 때로 “하류로 살았다”며 쓴 웃음을 짓는 한 거장이 한국 영화계에 보내는 ‘선물’이 아닐까.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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