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대목은 낙안이가 설사를 하자 아버지 성한모가 그를 파출소에 데려다 주는 장면이다. 이는 성한모의 순진무구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려지지만 아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한모는 그저 경호실장 앞에서 일종의 쇼를 함으로써 낙안이를 구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아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게 된다. 그런데 영화의 뒷부분에는 “설사병이 걸렸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는 낙안이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혹시 이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대변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변을 계속 참다가 옷에 흘리곤 하는 아이들이 있다. ‘기능성 유분증’이라고 하는 이 병의 심리적 근저에는 억압된 분노와 반항심리가 있다. 대적할 수 없는 대상에게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를 가지고 저항하는 것이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설사를 한 낙안이가 겪은 고문과 고통은 혹시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심한 벌을 받았던 낙안이의 기억이 낳은 환상 속의 사건은 아닐까. 낙안이의 마음의 병이란 그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낙안이의 병이 치유되는 계기는 아버지가 그림 속에서 긁어낸 통치자의 눈이 들어있는 약을 마신 것이다. 이는 아들이 그 아버지의 위에 더 큰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다. 아버지 역시 자신만큼 불완전한 존재이며 의도된 가해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불안과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낙안이가 다시 걷게 되는 장면과 성한모가 새로운 통치자를 거부하는 장면을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이런 용서의 과정이 두 세대간에 걸쳐 일어났음을 드러낸다.
최근에 듣게 된 노래가 있다. “당신을 증오해 왔던 시간들 자학해 왔던 어린 시절들/ 그건 당신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랬던 듯싶어/ 알아 당신도 아버지처럼 당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그저 강해 보이려 했단 걸 이젠 모두 용서하려고 해”(스위트피, ‘당신의 그 아버지처럼’)
빛나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부모를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존재가 아니라 그저 독립된 타인으로 지각하고 그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게 되면서 비로소 나도 독립된 성인이 되어 가는지 모른다.
우리의 근대사는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 힘의 논리와 저항으로 일관되어 왔던 ‘부자관계’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화적 각색 혹은 노스탤지어의 힘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효자동 이발사’에 그려진 아버지상은 그런 역사의 질곡을 다시 바라보려는 과정에서 나온 타협의 산물이다. 한국영화는 저항이냐 용서냐의 가운데쯤에서 어중간하게 서성이는 것 같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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