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제작에 얽힌 뒷얘기였다. 당시 20세기폭스의 제작자였던 마크 고든은 파라마운트로부터 영화 제작을 지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톱스타의 출연이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였다. 가까스로 점심 식사에 행크스를 초대한 고든이 작품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한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흥미를 보이던 행크스가 후식을 주문하듯 뜻밖의 말을 흘렸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하면 어떨 것 같으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스필버그-행크스, 할리우드의 파워 맨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전쟁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스필버그를 행크스는 말 한마디로 같이 일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행크스의 필모그래피는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다양해 어느 작품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너선 드미 감독의 ‘필라델피아’ 이전 작품들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 전까지 행크스는 정말 ‘고만고만한’ 로맨틱 코미디 전문 배우였을 뿐이다. ‘스플래시’나 ‘빅’ 같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친다. 그건 행크스 자신도 그럴 것이다. 그 역시 변신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 흔적은 ‘그들만의 리그’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정했던 행크스는 이 작품에서 여성 야구단의 감독으로 나온다. 터프 가이로 보이기 위해 체중도 엄청 늘렸다.
행크스의 대표작은 뭐니 뭐니 해도 ‘필라델피아’와 ‘포레스트 검프’. 좋은 배우는 영화를 통해 사회의 흐름을 바꾼다. ‘필라델피아’에서 행크스가 그랬다.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지만 에이즈 환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해고한 법률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동성연애자 앤드루 역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수십kg을 감량하면서 열연을 펼쳤다. 임종을 앞두고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이 병상에서 한 명씩 인사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코끝이 시려진다. 모두들 의연하려고 노력한다.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널 사랑한다”며 “너는 나의 영원한 천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끝내 둘째 형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형을 힘없는 손으로 안으며 토닥이는 앤드루, 곧 깡마른 행크스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에이즈 혹은 에이즈처럼 취급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
물론 최근 작품들도 좋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의 밀러 대위 역은 행크스 말고는 떠올려지는 인물이 없다. 왜냐하면 밀러 대위는 ‘야 개자식아’ 따위의 말투를 일삼는 전형적인 전쟁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밀러는 전장 한복판에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약간은 허무적인 인물이다. 톰 행크스가 없으면 밀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크스의 진정한 걸작은 샘 멘데스 감독의 ‘로드 투 퍼디션’이다. 연옥으로 가는 길. 영화에서는 퍼디션이란 이름의 지방으로 가는 길을 뜻하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 복수의 총을 든 아버지의 선택은 자식을 위해 지옥 불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들 아버지 모두를 대변한다. 행크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정(父情)과 냉혹한 킬러의 모습을 오가며 보는 이들의 가슴을 휘어잡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캐스트 어웨이’, 그리고 ‘로드 투 퍼디션’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작(秀作) 행렬을 생각하면 최근 개봉된 신작 ‘레이디 킬러’는 범작이자 소품이다. 하지만 꽤나 쏠쏠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50년대 작품을 리메이크한 이 영화에서 행크스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잔뜩 폼 잡는 사기꾼 교수 역을 맡았다. 에단, 조엘 코엔 형제감독 영화치고 광고 카피에서 감독이 쑥 빠지고 배우가 나온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행크스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얘기다. 15세 이상 관람 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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