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영화파일]‘비련의 여인’…‘클린’의 장만위

  • 입력 2004년 11월 18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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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여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영화 ‘클린’의 장만위. 사진제공 스폰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여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영화 ‘클린’의 장만위. 사진제공 스폰지
모공에 티끌 하나 없는 청정미인 장만위(張曼玉)는 올리비에 아사이야 감독의 새 영화 ‘클린’에서 헤로인 중독으로 감옥까지 끌려가는, 망가지는 역할을 무리 없이 해낸다. 그는 곧 감옥을 나오지만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한다. 영국에서 음악을 하는 친구들도 등을 돌리고 캐나다에 살고 있는 죽은 전 남편의 부모들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프랑스에서 식당을 하는 홍콩의 친척들은 매몰차게 일자리를 빼앗는다.

사람들은 그녀가 로커였던 전 남편을 헤로인 중독으로 몰고 가 결국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게 했다고 생각한다. 전 남편은 죽은 후 더 유명해졌지만 그에게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주변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영화 속에서 장만위는 마약을 끊고 캐나다 시부모 집에 방치했던 아들을 되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남편을 대신해 다시 음악을 하려고 애쓴다.

왕자웨이(王家衛)와 관진펑(關錦鵬)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홍콩 작가주의 감독들의 여주인공으로 그동안 눈부신 미모의 여신 취급을 받아서인지 ‘클린’에서 보이는 장만위의 모습은 눈물겹게 느껴진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이번 연기는 최근 작품 가운데서 가장 진실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다. 무엇보다 장만위는 이번 영화에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의 외로움과 아픔을 보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지금 세상에는 영화 속 장만위처럼 삶을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들 천지다. 삶을 새롭게 가져가는 일은 한편으로는 매우 힘겹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런 노력만큼 눈물겹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 영화 ‘클린’은 그래서, 진실로 가슴 아픈 작품이면서 동시에 진실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장만위의 필모그래피는 두 가지 부류의 영화들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열혈남아’로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은 그는 ‘아비정전’과 ‘완령옥’ ‘첨밀밀’ ‘화양연화’ ‘영웅’ 등의 작품에서는 늘 우아하면서도 비극적인,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하지만 ‘신용문객잔’이나 ‘동방삼협’ 혹은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같은 데에서는 전혀 다른 이미지, 밝고 유쾌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아무래도 장만위에게 어울리는 것은 후자보다는 전자 쪽이다. 후자의 작품 가운데 가장 수작(秀作)으로 꼽을 만한 영화는 ‘신용문객잔’ 정도다. 장만위의 가장 이색적인 출연작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웨인왕 감독의 1997년 작 ‘차이니즈 스토리’가 아닐까 싶다. ‘클린’에서의 망가진 이미지는 ‘차이니즈 스토리’ 때의 집시 캐릭터와 유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클린’에서 장만위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자신이 세계적 스타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아시아계 여배우의 화려한 다국적 연기는 같은 아시아 관객들에게 뿌듯함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올리비에 아사이야 감독은 전작인 ‘이르마 벱’에서 장만위를 세계적 배우로 만드는 데 실패했지만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르마 벱’은 프랑스 작가주의 감독 특유의 지나친 자의식의 과잉이 배어있던 작품이었던 데 비해, ‘클린’은 아사이야 감독의 작품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진실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르마 벱’ 때 아사이야 감독과 장만위 두 사람은 부부로 같이 살았지만 ‘클린’은 이혼 후 친구로서 함께 작업을 한 영화다. 장만위는 이 영화로 5월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클린’은 장만위 말고도 닉 놀테와 베아트리체 달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꼭 접해야 할 작품이다. 특히 놀테의 모습은,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 하나만으로도 연기자는 삶에 대한 통찰력과 깊이를 표현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올 초겨울에 만나는 최고의 수작 가운데 하나다.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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