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개봉되는 영화 ‘키다리 아저씨’에는 액자소설처럼 색깔이 다른 사랑들이 겹쳐진다. 영미가 보이지 않는 후원자를 떠올리며 연상하는 동화 ‘키다리 아저씨’가 영화 전체의 바탕화면이라면, 영미가 세든 집의 주인이 차마 고백하지 못한 채 자신의 컴퓨터에 기록으로 남겨둔 짝사랑 이야기는 영미가 ‘키다리 아저씨’를 찾아가는 열쇠노릇을 한다. 앞만 보고 열심히 산 덕에 마침내 라디오 방송작가가 된 영미가 방송국 자료실 직원 김준호(연정훈)와 담백한 빛깔로 빚어내는 연정은 이 서로 다른 사랑이야기들의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키다리 아저씨’의 배우들이 감독에게 반복적으로 들은 주문은 “힘을 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감성이 터질 듯한 대목은 부러 잘라내고 꾹꾹 누른 흔적이 역력하다. 흥행메이커인 하지원과 청춘스타 기대주인 연정훈이 주연이지만 두 사람은 이렇다할 키스신이나 포옹 한 번 없이 서로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익살스러운 캐릭터의 ‘약방감초’ 격으로 배치됐음이 분명한 조연 정준하(이 PD)와 신이(동료작가 쫑) 커플조차 자신들의 장난기를 참는 얌전한 모습이다.
이렇게 덤덤하게 절제된 러브스토리에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유행가 가사나 하이틴로맨스 소설처럼 상투적이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가슴을 울리는 설정과 대사들이다. 10년을 가슴앓이하며 짝사랑하면서도 상대 앞에 떳떳이 나서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수줍은 마음, 새벽의 동네 산책이나 놀이공원에서의 야간 데이트, 직장에서의 고단한 인간관계로 영미의 마음이 지쳐있을 때 ‘외로울 땐 나를 안아주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배달되는 커다란 곰 인형, 사랑을 확인한 순간 예정된 죽음으로 상대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운명의 장난…. “재채기하고 사랑은 숨길 수가 없대.” “별에 대한 전설 알아요?… 사랑하는 마음이 하늘로 가서 별이 되기 시작했대요.”
어디선가 한번쯤은 읽었거나 들었음직한, 혹은 연애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번쯤은 벌여보았거나 편지에라도 인용해보았을 법한 이벤트와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배우들을 파스텔톤으로 순하게 고정한 이유가 잡힐 듯도 하다. 관객들이 배우나 스토리에 몰입하기보다는 이어지는 에피소드들 속에서 한때 자신을 스쳐갔던 사랑의 첫 마음을 발견하고 거기에 공명(共鳴)하기를 바라는….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배역’은 음악이다. 주제곡으로 반복되는 S 포스터의 가곡 ‘꿈길에서’, J D 사우더의 ‘유아 온리 론리(You are only lonely)’, 여성로커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은 이 아날로그형 러브스토리의 정서적인 톤을 유지시켜준다.
누구보다도 억제된 연기로 캐릭터를 구축해야했던 인물은 준호 역의 연정훈이다. 스물일곱 살, 키 180cm의 이 건장한 청년은 구부정하게 어깨를 숙인 채 느릿느릿 걷는 뒷모습을 통해 하루하루 ‘존재가 스러져가는’ 착한 사내 준호를 연기했다. 촬영 내내 “웃지 말라”는 감독의 주문을 소화해내기 힘들었다는 그는 “사랑에 제약이 따르면 그만큼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자신이 연기한 준호의 내면을 설명했다.
이 영화로 데뷔한 공정식 감독은 말했다. “세상의 사랑이 이렇지 않아도 괜찮다. 동화 속 사랑처럼…잔잔한 위안을 그리고 싶었다”고.
‘키다리 아저씨’의 얼굴은 영화 초반 그를 애써 찾으며 영미가 했던 이 혼잣말 속에 이미 다 그려져 있다.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1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 가.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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