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 같은 주제는 일본 현대영화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바이브레이터’처럼 겨우 제목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내용까지 ‘갈 데까지 간’ 하드코어여서, 지난해 국내 수입심의 과정에서 결국 ‘불가’ 판정을 받은 ‘도쿄 데카당스’(1992년) 같은 작품이 어쩌면 그 원류일 수 있다. 일본 신세대의 저항정신과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대변하는 작가 무라카미 류가 자신의 작품 ‘토파즈’를 직접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한 평범한 여성이 SM클럽(섀도매저키즘 클럽)의 직업적 콜걸이 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내용만큼 영화의 전체 분위기가 상당히 성 도착적이어서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늘 걱정하는 국내의 점잖은 관객들에겐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하지만 ‘도쿄 데카당스’에서 무라카미 류의 의도는 분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에로틱한 영화 베스트50(The 50 Most Erotic Films of All Time)’의 저자 메이틀랜드 맥도나우의 해석을 빌리자면 이렇다.
“(도쿄 데카당스는) 일본이 세계에 제시하는 정돈된 이미지의 배면에 충격적 성도착 증세가 숨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극중에서 SM클럽을 운영하는 한 여성에 의하면 그녀의 고객인 부유한 사업가들이 성적 굴욕을 원하는 것은, 비록 일본이 부를 소유하고는 있지만 그 부에 긍지가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이브레이터’는 분명 ‘도쿄 데카당스’와는 180도 다른 분위기와 스타일이지만 그 정신적 맥락은 깊이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도무지 자신들 스스로에게 ‘긍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내면의 고통을 과연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 건지, 그렇다면 자신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등. 무라카미 류가 했던 것처럼, 영화 ‘바이브레이터’가 묻고 있다.
거식증과 불면증, 심각한 환청 증세와 알코올중독에 빠져 있는 여류 프리랜서 르포작가 히야카와 레이(데라지마 시노부)는 24시간 편의점에 화이트 와인을 사러 갔다가 역시 프리랜서 트럭 운전사인 오카베 다카토시(오모리 나오)를 따라 그의 차안으로 올라선다. 자동차 엔진의 바이브레이션(진동)을 느끼며 두 사람은 충동적으로 몸을 섞게 되고, 다음날 아침 레이는 다카토시를 따라 도쿄에서 니가타로 길을 떠난다. 다카토시와 섹스와 대화를 반복하면서 레이는 그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환청 증세가 사라졌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아카사카 마리의 동명 원작소설을 일본 핑크무비(일본의 초저예산 에로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히로키 류이치 감독이 영화화한 이 저예산 디지털 로드무비는 이성적, 관념적인 한 화이트칼라 여성이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블루칼라 남자를 만나 자신의 히스테리 증상을 치유 받는 얘기다. 가치관과 지향점을 잃고 방황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병적 강박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회, 욕망을 갖지 못하게 된 성불구의 사회, 그럼으로써 오히려 순수와 순백의 가치를 상실하고 만 사회. 최근의 일본영화들이 절대적으로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자 경향이다. 사카모토 준지의 ‘6월의 뱀’이나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역시 조금씩 변주를 해내고 있긴 하지만 결국엔 같은 맥락의 얘기를 전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일본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말 우리라고 뭐, 나을 게 있겠는가. 다음달 4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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