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네 감독이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2004년 작 ‘인게이지먼트’(원제 Un long dimanche de fian¤ailles)를 이끌어가는 것도 여전히 사람 안에 깃든 ‘보이지 않는 선한 힘’에 대한 믿음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일리언4’를 감독하며 경험한 할리우드 스타일의 스펙터클이 소극장 연극 같던 그의 연출 스케일을 확대한 것. 마치 “나(프랑스 영화)도 다 할 줄 안다”고 할리우드를 경쾌하게 비꼬는 것처럼 ‘인게이지먼트’는 드라마, 미스터리, 로맨스, 액션, 전쟁 영화의 여러 요소를 2시간 14분의 상영시간 안에 포만감 느껴지게 한 상 차려놓았다.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 프랑스 북서부 해안 지방인 브르타뉴. 이곳에서 나고 자라 열 살, 아홉 살의 소년 소녀시절부터 서로를 사랑해 온 마네크(가스파 울리엘)와 마틸드(오드리 토투)는 약혼한 사이다. 그러나 마네크는 전쟁에 징집되고, 고향에 남아 그를 기다리던 마틸드는 어느 날 약혼자가 자해를 했다가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동료 죄수 네 명과 함께 적군과 아군 사이의 비무장지대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모든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며 마틸드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마틸드는 마네크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마네크의 시신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마틸드는 수수께끼에 싸인 약혼자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해 나가는데….
프랑스 영화 역사상 전 세계 최대 흥행 기록을 세운 ‘아멜리에’(2000년 작)에서 엉뚱하면서도 발랄하고 직관의 힘이 넘치는 아멜리에를 연기했던 토투는, 이번 작품에서도 비관적 상황에서 긍정의 힘을 잃지 않는 여인의 모습을 때론 신비스럽게, 때론 앙증맞게 소화해냈다. 작품 속 마틸드는 사고로 일찍 부모를 잃는 데다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아가씨. 그러나 이런 상처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거나 예감할 수 있는 그녀의 비범성을 오히려 흑백의 콘트라스트처럼 부각시킨다.
탐정까지 고용해 마네크의 행적을 추적해나가던 마틸드는 다섯 명의 죄수들이 마지막 순간 대통령 사면을 받았지만 부패한 사령관에 의해 사면 명령이 묵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 마네크를 살리려고 했던 것은 말단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때로 군령을 어기고 때로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면서까지 “내 손에서 마틸드의 심장이 뛰어”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라고 헛소리처럼 되뇌는 순박한 청년 마네크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폭탄이 터져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동료의 내장을 뒤집어쓰는 참혹한 전쟁 상황과 마틸드와 마네크가 사랑을 나누던 아름다운 브르타뉴 해변 장면의 교차를 통해 주네 감독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죽임’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겨내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마틸드가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약혼자 마네크인 동시에 삶에 대한 희망이다. 마네크처럼 자해를 해서라도 제대명령을 받으려 했던 병사들은 비겁자나 매국노가 아니라 삶을 향해 ‘탈주’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주네 감독은 보여준다. 감독은 고향에 돌아가 농장을 일구려 한 농부, 쓰레기들로도 발명품을 만들 수 있었던 목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에피소드를 겹겹이 쌓아가며 이를 확인시킨다.
죽음과 파괴로부터 탈주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의 에너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겠다’는 소망이다. 마틸드가 마네크 찾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적기가 총알세례를 퍼붓는 비무장지대에 던져진 마네크가 죽어서라도 약혼녀에게 돌아가겠다며 나무에 ‘마네크는 마틸드와 결혼한다’는 뜻의 MMM 석자를 새겨 넣었듯이….
조연으로 출연해 프랑스어로 연기하는 조디 포스터를 보는 반짝 즐거움도 있다.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