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국이나 노동석이나 혹은 이윤기나 모두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장년들의 불안 증후군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삶의 목적성을 잃고 부유하는 세대, 그것이 이념적인 것 때문이든 탈이념적인 것 때문이든 혹은 물질적인 이유에서든 관념적인 이유에서든, 모두들 심한 내상(內傷)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누가 우리 세대의 청장년들에게서 희망을 앗아갔는가. 그 현장을 목도하는 순간순간 가슴에 통렬한 회한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세상을 마주하는 자신의 위치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이 자기의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을 넘어 노동 과정 그 자체에서 소외되고 있는 젊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이윤기는 소시민의 여성을, 그리고 이번 ‘가능한 변화들’의 민병국은 비루하고 위악스러운 내면의 지식인들과 중산층의 세계를 그린다.
놀라운 것은 이들 세 영화가 스타일 면에서도 독특한 자기 영역을 스스로 개척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영화 ‘가능한 변화들’은 아무리 늦깎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데뷔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공간 활용과 빛의 감각을 선보이고 있다. 극의 거의 전체를 풀샷 위주로 찍어낸 이 영화는 그럼으로써 웬만해서는 관객들이 인물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려 한다. 관객과 극중 인물 간의 거리는 곧 극중 인물과 인물 간의 절대적 거리감을 계속해서 유지시킨다. 그곳이 어떠한 공간이든 극중 인물들은 하나의 파편화된 존재로서만 기능한다. 이들은 대화를 나누든, 술을 마시든, 싸움을 하든, 심지어 섹스를 하든 좀처럼 관계를 좁히지 못한다. 소통의 시도는 계속 실패하고 점차 그 의지조차 상실돼 가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그런 인물들을 철저하게 제3자의 위치에서, 관찰자의 시선에서 지켜볼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게 남의 일처럼 드라마를 지켜보는 어느 순간 감독이 얘기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거꾸로 자신의 가슴팍을 향한 비수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지금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가능성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더 나아가 우리는 과연 변화를 꿈꿀 수 있기나 한 것일까,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우리가 언젠가 변화를 꿈꾼 적이라도 있기나 한 것일까. 감독의 비통한 좌절에 가슴 한 켠으로 한숨을 몰아쉰다.
이렇게까지 애기하면 ‘가능한 변화들’을 정말로 심각하고 지루하며, 비관적이고 어두운 얘기로만 채색돼 있는 영화로 생각하기 쉽겠다. 하지만 114분의 러닝 타임은 비교적 빠른 호흡으로 흘러간다. 아마도 그것은 극중 두 남자, 문호와 종규 그리고 이 둘을 둘러싼 여성들이 벌이는 강렬한 섹스 장면들 때문일 수 있다.
유부남이자 작가 지망생인 문호는 채팅을 통해 만난 화이트칼라 여성을 유혹하고 결국 그날의 ‘작업’을 완수한다. 뇌중풍 후유증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된 종규는 육체적, 심리적 핸디캡을 자신이 다니는 연구실의 여자를 상대로 혹은 대학교수인 첫사랑 유부녀를 상대로 가학적이고 변태적 방식의 섹스로 풀어낸다. 문호와 종규는 때로 밥집에서 우연히 걸려든 여인을 상대로 2 대 1의 섹스 향연을 펼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섹스 파티’는 기이하게도 지치고 피곤하며, 우울하고 병적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 보인다. 이 둘은 극중 내내 여자들을 상대로 구질구질하고 치졸한 연극을 펼치지만 이상하게도 경멸감보다는 동정심이 느껴진다.
종규는 극 말미에 문호에게 혹은 자기 스스로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머리가 터져서 몸이 망가졌을 때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사는 게 두렵다”고. 죽음보다 삶이 더 두려워진 시대. 거짓된 희망과 낙관을 얘기하는 100편의 영화보다 진실된 절망과 그 불안을 얘기하는 한 편의 영화가 종종 용기를 주는 법이다. ‘가능한 변화들’이 올 상반기 최고의 영 화이자, 가장 귀중한 발견의 작품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8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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