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버림받은 멕시코의 젊은 주부 플로르(파즈 베가)는 6세 된 딸 크리스티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밀입국한다. 영어를 배울 필요 없이 스페인어만으로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로스앤젤레스 라틴계 거주지역에서 낮과 밤에 시간제로 일하던 플로르. 딸이 10대로 접어들자 낮에만 일할 수 있는 곳을 찾던 그는 사촌의 소개로 일류 요리사 존 클라스키(아담 샌들러)의 집 가정부가 된다. 존에게는 부인 데보라(테아 레오니)와 10대 초반의 뚱뚱한 딸 버니스, 약간 정신박약 기미가 보이는 아들 조지, 그리고 알코올중독에 가까운 왕년의 재즈가수 장모가 있다.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쏟아 붓는 데보라는 아이들에게도 애정보다는 ‘양육서적’을 들먹이는 등 편집증적으로 대할 뿐이다. 플로르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이 가족들 사이에서 의미가 뭉텅뭉텅 빠진 말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준다.
데보라는 딸 버니스에게 옷을 사다주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입을 수 없는 작은 치수의 것이다.
“이렇게 아이에게 (살을 빼도록) 자극을 주는 것도 좋다고 의사가 말했어요.”
그러나 플로르는 밤에 몰래 버니스의 방에 들어가 옷을 가지고 와서는 솔기를 뜯어 버니스가 입을 수 있도록 수선해 놓는다. 몸을 옷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을 몸에 맞춰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존의 가족 누구도 데보라에게 하지 못한다.
존은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식당 비평 기자가 자신의 식당에 대한 리뷰를 하러 나왔다고 하자 별 4개 만점짜리 비평보다는 3과 3분의 1개를 받자고 결심한다. 그렇게 하면 식당의 자존심도 살리면서 진정 음식을 사랑하는 미식가들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막상 신문 비평에서 별 4개를 받자 그의 반응은 이렇다. “퍽 유(Fuck you).” 존의 예상대로 이후 그의 식당은 넉 달 동안 ‘상류층’ 고객으로 예약이 다 차버린다.
영화는 의사소통의 문제라는 얘기에 딸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과 자존심이라는 다른 얘기를 곁들이고 있다. 뚱뚱한 딸 버니스보다 귀엽고 똑똑한 크리스티나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데보라는 크리스티나가 장학금을 받아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플로르는 어머니로서 자신의 역할을 침해받았다고 생각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사립학교에 다니고 싶은 딸 크리스티나와 플로르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1997년 코미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로 결벽증 심한 중년 남성의 사랑 찾기를 매혹적으로 보여준 제임스 L 브룩스 감독은 7년 만의 이 신작도 예의 매끈한 코미디로 만들었다. 웃음의 사이즈는 크지 않지만 잔잔하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진실한 의사소통의 부재와 모녀간의 갈등이라는 두 가지 얘기가 보는 사람이 납득할 만큼 매끄럽게 맞물리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감독의 가슴에 남을 듯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발견은 플로르 역을 맡은 스페인 여배우 파즈 베가(28). 페넬로페 크루즈의 관능적인 청순함과 영화 ‘사랑과 영혼’의 데미 무어의 애잔함을 섞어 놓은 듯한 그는 라틴계 여성의 정열적인 부드러움과 딸을 키우는 젊은 엄마의 단호함을 잘 표현해 냈다. 원제 ‘Spanglish’는 스페인어와 영어의 합성어로 히스패닉들이 스페인어투에 실어 사용하는 영어를 지칭한다. 22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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