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신예 한스 바인가르트너 감독의 ‘에쥬케이터’를 보고 있으면 20여 년 전의 우리 청년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1980년대 초반 우리 청년들은 이 영화의 얀과 율, 그리고 피터와 같은 젊은이들이었다. 1980년대라면 분배가 고르게 이루어지고 계급평등이 실현되는 세상을 꿈꿨던 시절이었다. 우리 사회도 한때 그렇게 젊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독일사회나 한국사회나 순수한 이념의 열정을 잃은 지 오래다.
영화 ‘에쥬케이터’가 특이하고 또 역설적으로 신선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의 20대 젊은이들이, 이미 소멸해 버린 것으로 알았던 이상(理想), 곧 세상의 전복과 혁명에 대한 꿈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바인가르트너 감독은 영화 내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언제 혁명을 꿈꿨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과 같은 시대에 과연 혁명을 꿈꾸는 세대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영화 속 주인공 얀(다니엘 브륄)과 피터(스티페 에르켁)는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밤마다 부잣집에 들어가 집안을 엉망으로 해놓은 뒤 에쥬케이터란 서명으로 쪽지를 남겨 놓고 나오는 희한한 밤손님들이다. 쪽지에는 늘 이렇게 쓴다. ‘풍요의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신은 돈이 너무 많아. 에쥬케이터로부터.’ 그들의 철칙은 절대로 금품을 털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정당해야 세상에 자신들의 경고 메시지를 분명하게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피터의 애인인 율(율리아 옌치)은 몇 달 전 부호인 하르덴베르그(버그하르트 클로즈너)란 남자의 10만 유로(약 1억5000만 원)짜리 벤츠를 들이받아 차값을 몽땅 빚으로 떠안게 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저녁때마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조차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해고된 율은 얀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망친 하르덴베르그의 집에 ‘침입’한다. 그리고 결국 뜻하지 않은 사고에 맞닥뜨린다. 얀과 율과 피터가 하르덴베르그의 납치범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
아이러니는 이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부르주아 하르덴베르그가 알고 보니 자신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유럽 68혁명 주역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하르덴베르그와 세 명의 젊은이가 벌이는 사상논쟁은 소품처럼 보이는 이 저예산 디지털 영화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담겨 있는가를 나타내 준다. 하르덴베르그는 세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일이 천천히 벌어져서 알아채지 못했던 것뿐이야. 어느 날 낡은 차를 버리고 에어컨이 있는 좋은 차를 갖고 싶게 돼. 결혼해서 가족을 부양하게 되고, 집을 사고, 애들을 잘 키우고 싶어지지. 근데 그게 다 돈이야.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침입해서 집을 엉망으로 해놓은 걸 보게 되면 주저 없이 보수당에 한 표를 찍게 되는 거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상반되지만 비교적 균형있는 텍스트를 던져 놓고 있다는 점에서 ‘에쥬케이터’는 근래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무엇보다 더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견 없이 사물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계급은 미워하되 사람까지 미워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세상을 바꾸는 건 결국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소통과 이해에 있다는 것임을 깨닫는 쪽에 있다고 이 영화 ‘에쥬케이터’는 역설한다. 이 영화가 강조하고 있는 정말로 중요한 점 한 가지는, 다소 맹동적이라 하더라도 변화와 혁명을 꿈꾸는 순수한 열정의 젊은 세대가 없는 한 그 사회는 이미 생명과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야말로 죽어가는 사회를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시인들이다. 죽은 사회의 시인들을 위하여. 진정한 에쥬케이터를 위하여. 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