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후반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킨지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킨지는 1960, 70년대 여성 월간지의 별책 부록이나 삽지 형태로 제본된 미니 북을 통해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봉인된 그 미니 북을 통해, 그리고 킨지란 이름을 통해 자위 혹은 마스터베이션, 오럴 섹스, 애널 섹스, 클리토리스 등의 용어를 배웠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욕망을 드러내고 또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킨지는 사람들의 잠자는 욕망을 깨웠다.
킨지는 1948년과 1953년에 각각 ‘인간에 있어서 남성의 성행위’와 ‘인간에 있어서 여성의 성행위’란 연구보고서를 발표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성 혁명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이다. 인디애나 주립대 동물학 교수였던 킨지는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섹스연구소를 설립한 후 무려 1만2000명에 이르는 사람들과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성적 행동양식을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섹스학 혹은 성(性)과학은 킨지의 연구를 시작으로 공론화되고 또 본격화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의 1940년대와 50년대라면 냉전 이데올로기와 함께 극우 보수의 기운이 한껏 고조돼 있었던 시대다. 정치사회적 억압기제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 표면적으로 사람들을 억누르는 정서는 강고한 도덕률이다. 특히 섹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금욕주의가 통용된다. 정치적 통제는 섹스를 금기시함으로써 효과를 얻는다. 이를 거꾸로 보면, 정치적 탈 권위와 사회적 민주화라고 하는 문제는 섹스의 혁명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킨지와 그의 보고서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갔다는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당시 그는 다른 의미의 사회운동가였던 셈이다.
빌 콘던이 킨지에 주목했던 것은 이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빌 콘던은 결국 1940, 50년대의 미국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미국사회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빌 콘던은 지금의 미국사회가 과거처럼 엄격하게 통제되고 닫혀져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싶다.
작가들, 그러니까 영화감독들은 뭔가가 자신을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그것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며, 그럴 때 작가가 쥐려고 하는 무기는 한편으론 표현 수위가 높은 폭력이며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금기시하려는 섹스의 문제일 수 있다. 빌 콘던은 결국 후자를 택한 셈이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빌 콘던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를 자꾸 성적으로, 정치적으로 가둬놓고 싶어? 그러면 내가 진짜 센 얘기를 들려주지. 예전에 킨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야.”
따라서 ‘킨제이 보고서’는 내러티브 구조를 분석한다든지, 캐릭터를 연구한다든지, 카메라와 조명과 의상과 배우의 연기와 음악 따위가 어떠했는지를 보는 영화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빌 콘던이 과연 왜 이런 작품을 찍고 싶어 했는지를 유추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는 줄곧 낙태와 동성애, 안락사와 사형제도의 폐지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창작 표현의 수위 문제 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비교적 진보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을 빌 콘던은 아마도 그 같은 부시 권력의 태도에 대해 영화를 통해 한마디 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쪽 입장을 두둔하고 또 지지하는가는 철저하게 각 개인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다. 13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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