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의 마지막 대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 주인공 ‘동수’의 독백을 통해 홍상수 감독이 느끼는 강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홍 감독은 고백한다. ‘(감독으로서) 죽지 않고 오래 사는 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그의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27일 개봉)은 홍 감독의 기존 작풍이 반복되면서도 뭔가 밑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 그건 홍 감독이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물들이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모습이다. ‘극장전’은 홍 감독의 영화 중 가장 관객과 친하고, 가장 웃기며, 가장 남에게 덜 냉소적이고, 가장 자기 풍자적이다. 이는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꼬집고 풍자하는 방식으로 자기진화를 도모할 수밖에 없는 홍 감독의 높고 외로운 처지를 역(逆)으로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극장전’은 ‘영화 속 영화’를 담은 전반부와 영화 속 영화가 끝난 뒤 극장 밖에서 벌어지는 ‘영화 속 현실’을 담은 후반부로 이뤄진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서로 닮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며, 때론 무관하기도 하다.
수능시험을 마친 상원(이기우)은 안경점에서 일하는 첫사랑 영실(엄지원)을 우연히 만난다. 술자리에 이어 여관까지 가지만 상원의 ‘물건’은 말을 듣지 않고, 둘은 엉뚱하게도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영화 속 영화’는 여기서 끝. 암 투병 중인 선배가 소싯적 만든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예비감독 동수(김상경). 그는 영화에 나온 안경점 앞을 지나다 영화 속 여배우 영실과 마주친다. 영실을 종일 따라다니던 동수는 ‘드디어’ 그녀와 여관으로 향한다.
‘극장전’은 홍 감독의 어떤 영화보다 ‘점프(jump)의 미학’이 빛난다. △남자의 대사(“우리 이러다 사고 치겠다”)에서 여자의 대사(“내가 너 첩해줄까”)로 △주인공의 심정(행진곡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보무당당하게 여배우를 따라다닌다)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심정(‘졸렬하고 한심하다’)으로 △겉으로 보이는 상황(자살을 기도하려 수면제를 꺼내 놓은 모습)에서 구체적인 언행(“그럼 나 머리 좀 만질게”)으로 △‘영화 속 영화’에서 ‘영화 속 현실’로 훌쩍 점프해 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유머가 만들어지고, 인간세계의 가식이 드러나며, 홍 감독 자신이 풍자된다.
좀 더 들어가 볼까. 주인공 동수가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대목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 부분은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한 홍 감독의 선 굵은 ‘변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수는 선배 감독에게 털어놓았던 자신의 경험담(자살 기도, 빨간색 말버러 담배의 추억)이 고스란히 선배의 영화 속에 ‘도용’된 사실을 발견한다. 동시에 동수는 ‘영실의 몸에 엄청나게 큰 상처’가 있다는 항간의 ‘진짜 같은’ 소문은 말짱 거짓이었음을 몸소 (벗은 영실의 몸에서) 확인한다. 결국 홍 감독이 숨겨 놓은 진실은 이거다. ‘(자신의) 영화는 오히려 현실적’이지만 ‘(풍문만 나도는) 현실은 정작 허구적’이란 것.
자신이 본 영화에 전염돼 이를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동수의 모습. 이를 통해 홍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묻어 있는 ‘일상’이 단지 영화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을 물들이고 움직이는 강력한 동인(動因)이 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아! 정말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감독은 어느덧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왔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면 이젠 놀림거리가 자기 자신밖엔 남지 않을 정도로 어떤 ‘반열’에 오른 걸까. 한번 자줬건만 그래도 “한 번만 더”를 지저분하게 요구하는 동수에게 여배우 영실이 내뱉는 다음 한마디. 거기엔 ‘자기 복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자신의 영화세계를 스스로 비웃고 조롱하는 홍상수가 보인다.
“자기,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홍 감독은 역시 ‘혼자 놀기’의 진수를 안다. 18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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