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는 살아있다.’ 영화 ‘분홍신’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분홍색 하이힐을 탐하는 여인들마다 발목이 싹둑 싹둑 잘려나간다는 내용의 이 공포영화에서 김혜수는 ‘기대와 달리’ 안 벗는다. 목덜미마저 속 시원히 드러내지 않는 이런 ‘감추기 전략’은 외려 너무나 당연히 여겨지던 김혜수의 재능(연기나 신체 모두)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신선한 창(窓)이 된다. ‘분홍신’에서 김혜수를 재발견했다.》
▼표정▼
김혜수는 ‘분홍신’에서 ‘표정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준다. 표정의 개수를 최대한 줄이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반대로 자제함으로써 마치 화석화된 듯한 표정을 만들어 내는 것.
이 영화에서 △놀랄 때 ① △슬플때 ② △화날 때 ③ △공포에 떨 때 ④ △뭔가에 홀린 듯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⑤ △차갑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 때 ⑥ 김혜수가 구사하는 표정을 비교하면, 얼굴의 코 아랫부분을 경직시켜 무기력하게 만드는 동시에 코 윗부분, 특히 눈의 크기 조절을 통해 감정의 기복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의 콘셉트에 따라 표정의 콘셉트를 정해 양자를 밀착시키는 김혜수의 연기 재능이 숨어있는 대목.
전작 ‘얼굴 없는 미녀’에서 그녀(경계선 인격 장애를 앓는 주인공)가 보여줬던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표정 ⑦과는 대척점에 있다.
김혜수의 이런 표정전략은 마치 황량한 진공상태 같은 무기력한 기운을 영화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김혜수의 눈은 그녀의 극중 직업이 안과의사라는 사실과 더불어 피해자들이 눈을 집중적으로 훼손당한 채 발견된다는 극중설정과 맞닿게 된다.
▼목소리▼
여느 호러 퀸들이 목에서 만들어지는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데 반해, 김혜수는 아랫배에서 끌어 올린 복성(腹聲)을 사용한다. 이렇게 깊고 기름진 발성법 때문에 김혜수는 장시간 낮고 굵은 톤의 신선한(?) 비명소리를 들려 준다.
다른 호러 퀸들(‘꺄악’)과 달리, 김혜수의 비명이 ‘으악’ 혹은 ‘악’에 가깝게 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 안정된 호흡법 덕분에 김혜수는 천장에서 장마처럼 쏟아지는 피를 맞으면서 거의 30초에 달하는 ‘시리즈성 비명’(으악, 으으으으, 으악, 으으,으악, 으으, 으악, 으악, 으으으으)을 4박자의 안정된 리듬으로 토해내게 된다.
영화 라스트 신에서 “으어허허허허허”하는 김혜수의 낮고 굵직한 웃음소리는 연극배우 박정자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더빙 판에서 보여줬던 문어마녀의 웃음 이후 최고로 찝찝하고 섬뜩한 웃음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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