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리전트 베벌리 윌셔 호텔에서 만난 그는 이 고풍스러운 최고급 호텔이 잘 어울릴 만큼 ‘의외로’ 무겁고 진지했다. 9월 초 국내 개봉되는 스릴러 ‘나이트 플라이트(원제 레드 아이·Red Eye)’를 최신작으로 내놓은 크레이븐 감독은 “정말 무서운 건 괴물이나 사이코(미친 사람)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했다.
‘나이트 플라이트’는 야간 비행기에 탄 호텔리어 리사(레이철 맥애덤스)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남자(킬리언 머피)의 꾐과 협박에 빠져들면서 지옥 같은 현실에 맞닥뜨린다는 내용. 크레이븐 감독은 “진짜 공포는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있다. 비행기를 타는데 내 옆자리에 어느 누가 앉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현실 속 인간관계가 주는 공포”라면서 “9·11테러 이후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무방비 상태인지를 느끼며 공포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존스홉킨스대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5년간 강단에 서다 나이 서른에 영화 연출에 뛰어들었다. 공포영화의 관습을 좇는 듯하다 배신해 버리는 방식을 통해 그는 동어반복에 머물던 공포영화 장르에 새로운 문법을 긴급 수혈한 감독으로 평가된다.
그는 “대학 강의와 영화 연출은 똑같다”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0명이 넘는 아이(학생)들을 앉혀 놓고 1시간이 넘게 그들이 졸지 않도록 이런저런 관심을 끌면서 때론 즐길 만한 거리를, 때론 도전할 만한 거리를 끊임없이 던져 줘야 한다는 고민을 하는 게 강의다. 도대체 연출과 뭐가 다른가.”
그는 “‘나이트 메어’에서 프레디(꿈속에만 나타나는 살인마)가 지하에서 솟아올라 등장하는 장면은 내가 강의했던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며 “평론가들은 ‘바보스러운 소재’라고 비난하지만 사람들이 프레디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프레디가 사람들 안에 잠재된 어떤 공포의 전형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나이트 메어’나 ‘스크림’ 등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 영화들은 모두 예쁜 여자들을 살인마가 괴롭히는 내용이다. 예쁜 여자들에게 억하심정이 있는가”라고 짓궂게 물었다. 감독은 파안대소할 거란 예측을 깨고 “그거 아주 어려운 질문”이라며 고심 끝에 대답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감수성이 예민하다. 신체적으로는 작다. 이렇게 연약하고 예민한 여성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은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지난 100년간 지속되어 온 여성해방운동을 보라. 공포영화의 본질은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약자가 강자를 이겨내는 데에 있다.”
로스앤젤레스=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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