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첫 장편 ‘아름다운 시절’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한국영화 최초로 초청되면서 국내외 영화상을 휩쓴 이 감독이 7년 만에 새 작품 계획을 발표하는 것. 정물화 같은 느낌의 데뷔작을 잇는 그의 차기작 ‘나무 그림 동화’도 제목만큼 서정적일까?
26일 이 감독을 만났다. 첫 마디부터 놀라움을 지나 뒤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폭력적인 복수와 폭력적인 섹스로 얼룩진 영화가 될 겁니다.”
―왜 이리 오래 걸렸나.
“영화란 감독의 재능을 보여 주는 ‘전시’가 아니다. 내가 어떤 걸 궁금해 할 때,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할 때, 그리고 영화를 만듦으로써 내 인생에 어떤 의미로 다가온다고 여겨질 때를 기다렸다. 자기 쇄신이 없다면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다.
―잊혀지는 게 두렵지 않았나.
“아니, 좋았다. 난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남 앞에 서면 스트레스 받는다. 6년간 하던 교수직(중앙대 연극영화과)도 2002년에 그만뒀다. 난 주목 받는 게 체질적으로 싫다. 관객은 감독이나 배우를 기억해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의 힘에 끌린다.”
‘나무 그림 동화’는 최종 시나리오가 나오는 대로 내년에 제작에 들어가 2007년 6월 촬영을 마칠 계획. 1970, 80년대 운동권 남녀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국가 폭력을 피해 해외로 도피한 남자가 20년 만에 돌아와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배신자’들에 대한 복수를 판타지 형식을 가미해 다룬다(감독이 상세히 밝힌 복수과정과 결말은 구토가 치밀 만큼 끔찍하고 운명적이었다).
―이 시점에 왜 ‘과거’로 돌아가는지….
“내 관심은 현재다. 과거란 엉켜 있는 현실을 알 수 있는 실마리다. 나 역시 80학번(고려대 영문과)이지만 우리는 위선적 세대다. 애국을 외치지만 뒤집어 보면 제 살 길 챙기는 데만 바쁘다. 학생운동했던 과거는 훈장처럼 여겨진다. 우린 뭔가 승리하고 이룬 것 같은데 실제론 엉망진창이다. 패배의식을 느낀다. 역사는 결국 시민의 힘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저들이 권력을 잡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게 과연 우리의 승리일까. 과연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사회일까 하는 고민이 있다.”
이어 그는 ‘아름다운 시절’이 과거회상형의 얼음 같은 영화라면 ‘나무 그림 동화’는 현재진행형의 불같은 영화라고 말했다.
“스타일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 소재나 의도에 따라 달라야 한다. 이 영화는 절대 정적(靜的)일 수 없다.”
―순 제작비가 50억 원, 대중성도 무시할 수 없는데….
“(대중 반응에) 자신 있다. 신화나 동화 형식을 원용한 만큼 갖는 대중적 흡입력과 원시적 생명력이 강할 것으로 본다. 예술영화가 죽어가는 건 관객의 책임이 아니라 영화의 책임이다. 관객은 예술영화라는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는 진부한 영화 언어를 지루해 한다.”
이 감독은 얼마 전 아들(4세)과 함께 극장에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아들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아주었다고 한다. “요즘 극장 사운드가 너무 크다. 아이를 ‘영화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었다”는 게 이유. 이토록 ‘아름다운’ 그가 ‘18세 이상’ 등급이 확실시되는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이 감독은 “그게 나에 대한 선입견”이라고 웃으며 “포르노에 가까운 ‘나인 송즈(9 Songs)’를 만든 감독은 다름 아닌 (사색적인 영화) ‘인 디스 월드’를 연출한 마이클 윈터바텀”이란 말로 끝을 맺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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