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기현]러시아 영화가 되살아난 비결은

  • 입력 2006년 3월 23일 03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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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서남부 모스필름 가(街)에는 러시아 영화의 ‘메카’ 모스필름영화사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 모스필름이 지난 20여 년 동안 겪은 영욕의 세월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영화 같다.

모스필름이 해마다 수십 편의 영화를 제작해 사회주의권에 보급하던 소련 시절, 제작비는 국가예산에서 나왔고 흥행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영화인들에게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하지만 1991년 옛 소련의 붕괴는 ‘온실 속의 화초’ 같던 러시아 영화를 ‘광야’로 내몰았다. 정부의 지원은 사라졌고 개방의 여파로 외국산 영화가 밀려들어왔다. 영화관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철 지난 싸구려 영화가 휩쓸었다.

모스필름은 한 해에 겨우 1, 2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수십만 평의 스튜디오는 폐가처럼 변했고 직원들은 영화를 버리고 택시 운전사로, 보따리장수로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섰다. 20세기의 양대 거장인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를 낳은 찬란한 러시아 영화의 전통이 끊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2000년부터 ‘오일 머니’가 들어오면서 여유가 생긴 러시아 정부가 ‘빈사 상태’에 빠진 영화에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 영화를 살린 것은 정부 지원이 아니었다.

2000년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자본을 끌어들이고 영국 여배우 줄리아 오몬드를 캐스팅해서 세계 시장을 노리고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제작했다. 주변에서 무모한 시도라는 놀림을 받았다. 국내 시장에서도 외국 영화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에 해외 진출이라니….

이 영화는 해외 시장에서는 ‘예상대로’ 참패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대신 러시아 관객을 오랜만에 영화관으로 불러 모았다. 제정 시대의 화려한 궁정과 광활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는 러시아 영화도 할리우드 영화처럼 규모가 크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영화인들은 용기를 얻었다. 마침 방송사와 대기업들이 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억5000만 인구의 러시아 시장을 노린 외국 자본도 들어왔다. 모스필름도 스튜디오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활기를 찾았다.

지난해 러시아 영화계는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500만 관객을 동원한 ‘나이트워치’에 이어 ‘터키의 감비트(장기에서 선수를 잡기 위해 자기의 졸이나 말을 희생시키는 것)’, ‘9중대’, 나이트워치의 속편인 ‘데이워치’ 등이 흥행 기록을 차례로 갈아 치웠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는 러시아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소재도 다양했다. 선과 악의 충돌을 다룬 나이트워치 시리즈는 할리우드 못잖은 액션과 상상력, 특수효과를 보여 준 SF영화였다. ‘터키의…’는 제국주의 시절 터키와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첩보 추리물, 9중대는 아프가니스탄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다.

유럽 시장에서만 150억 원의 흥행수입을 올린 나이트워치 시리즈는 미국과 한국 등 전 세계로 배급됐다. 3편은 아예 영어로 제작하고 일부는 미국에서 촬영할 계획이다. 러시아 영화가 세계 영화계의 변방에서 일약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영화가 맞이한 제2의 전성기는 소련 시절의 그것과는 다르다. 국가의 보호와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손으로 이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고사 직전의 상황에서도 정부에 스크린쿼터 같은 손쉬운 보호막을 요구하지 않고 외국 영화와 힘겹게 경쟁하면서 창의력과 도전 정신으로 분투한 덕이다. 러시아 영화의 평균제작비는 약 6억 원. 사상 최대의 대작이라는 나이트워치도 한국 영화의 편당 평균 제작비(46억 원)에도 못 미치는 불과 42억 원이 들었을 뿐이다.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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