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비수기’피해 쏟아진 한국영화… 그 ‘춘투’의 성적표

  • 입력 2006년 5월 11일 03시 03분


《“세상에, 이럴 수가….”

요즘 영화 ‘국경의 남쪽’을 제작한 싸이더스FNH 관계자들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3일 개봉된 이 영화가 어린이날 연휴를 포함해 닷새간 모은 관객이 전국 22만 명(제작사 집계). 70억 원의 총제작비를 감안할 때, 손익분기점인 관객 수 250만 명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건 차라리 ‘재앙’이었다.

아무리 외화 ‘미션 임파서블 3’의 위력이 대단하기로서니….

월드컵 시즌을 앞두고 한국 영화들이 일제히 개봉을 앞당기면서 시작된 4, 5월 극장가 춘투(春鬪). 갖가지 이변을 낳고 있는 이번 싸움의 결과를 들여다보면, 국내 관객들의 관람 성향을 가늠해 보거나 한국 영화 제작과 마케팅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영화 자체의 힘’이 우선이다=‘국경의 남쪽’은 국내 최고의 티켓 파워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배우 차승원이 도전한 첫 멜로영화로 관심을 끌었지만 참패했다. 최근 가장 ‘뜨는’ 남녀 배우인 조승우 강혜정이 공동주연을 맡은 영화 ‘도마뱀’(4월 27일 개봉) 역시 9일까지 40만 관객에 그치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남겼다. 한류스타 최지우 주연의 멜로물 ‘연리지’(4월 13일 개봉)도 관객 수를 발표하기 꺼릴 만큼 민망한 결과로 막을 내렸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씨는 “이 같은 현상은 스타 마케팅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면서 “특히 ‘도마뱀’의 경우 스타 파워에 기대면서도 정작 ‘영화는 만듦새가 가장 중요하다’는 교과서적인 믿음을 저버렸을 때 나타난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9억 원(순제작비)을 들여 찍은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4월 6일 개봉)은 박용우 최강희라는 ‘조촐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관객 200만 명을 넘어섰다. 충무로에선 살인 스릴러와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참신한 시도와 요즘 젊은 관객층의 관심사를 훤히 꿰뚫은 듯한 맛깔스럽고 치밀한 대사와 구성을 ‘대박’ 요인으로 평가한다.

▽‘분명한’ 영화가 어필한다=국내 관객은 웃기거나 울리거나 아니면 화끈한, 정서가 분명한 영화를 선호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

우선 ‘국경의 남쪽’과 ‘도마뱀’은 제목부터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경…’의 경우 탈북의 스펙터클과 이념 갈등을 멜로와 섞은 블록버스터형 영화를 연상시키지만 실제론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순도 100%의 러브스토리다. ‘도마뱀’은 비유적인 제목부터가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 ‘네이밍(이름 짓기)’의 실패라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흥행에 성공한 ‘사생결단’ ‘맨발의 기봉이’(이상 4월 27일 개봉)는 제목과 내용 모두 분명하고 직선적이다.

한편 ‘국경…’의 참패는 그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단골 소재였던 ‘남북 분단’에 대해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영화사 관계자는 “사회적 이슈로서의 탈북에 대한 관심은 크지만, 영화 소재로서의 탈북에는 ‘비호감’을 느끼는 국민의 이중적인 성향이 드러난 것 같다”고 말했다.

▽‘계절 궁합’ 무시 못한다=‘사생결단’ ‘도마뱀’ ‘맨발의 기봉이’의 경우 같은 날 개봉돼 흥행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개봉 첫 주의 결과는 ‘사생결단’ ‘…기봉이’의 승리, ‘도마뱀’의 참패. 9일까지 전국 누계는 ‘사생결단’ 163만 명, ‘…기봉이’ 155만 명. 완성도와 작품성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은 ‘사생결단’은 그렇다 쳐도, ‘…기봉이’의 선전은 영화적 완성도에 비해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18세 이상 관람 가’인 ‘사생결단’에 비해 ‘전체 관람 가’인 ‘…기봉이’가 폭넓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기 때문. 가족 단위 관객이 많은 ‘가정의 달’ 5월을 노린 개봉 전략이 적중했다는 평가도 많다. ‘…기봉이’는 서울에선 ‘사생결단’에 뒤지지만 지방에선 앞선다.

반면 ‘코미디는 명절, 블록버스터는 여름, 멜로는 가을’이라는 국내 영화 개봉의 불문율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마뱀’ ‘연리지’ 등의 멜로영화는 힘없이 무너졌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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