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기자의 무비 다이어리]‘너스 베티’의 이미지중독

  • 입력 2006년 5월 2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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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중독된 베티(르네 젤위거 분)의 삶을 통해 이미지의 홍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삶을 유쾌하게 풍자한 ‘너스 베티’. 웨이트리스인 그녀는 음식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드라마에 중독된 베티(르네 젤위거 분)의 삶을 통해 이미지의 홍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삶을 유쾌하게 풍자한 ‘너스 베티’. 웨이트리스인 그녀는 음식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너스 베티(Nurse Betty·2000년)’는 TV 드라마에 중독된 베티라는 여자의 삶을 다룬 특이한 영화다. 웨이트리스라는 힘겨운 생활에 생일도 몰라주는 무심한 남편과 사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사랑하는 이유’라는 TV 메디컬 드라마. 드라마가 상영되는 날이면, 브라운관에 얼굴을 파묻듯 하던 그녀는 그날도 옆방에서 TV를 보다 남편의 피살 현장을 목격한다. 남편이 마약 뒷거래 조직과 거래를 하다 보복을 당한 것.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엿보던 순간 정신을 잃은 베티는 TV 속 이미지와 현실을 혼동하는 착란에 빠진다. 어느 것이 실제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그녀는 남편이 살해되던 순간, TV 화면에서 나오던, 주인공들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장면을 현실로 인식해 자신이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연인이 된 것으로 착각한다. 마침내 그녀는 남자 주인공을 만나러 차를 몰고 캔자스 촌동네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스튜디오까지 이르는 긴 장정을 시작하는데….

다소 황당하지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탈 정도로 이야기를 잘 풀어낸 이 영화는 드라마 중독이라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현상을 통해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오가며 이미지에 중독된 현대인들의 삶을 유쾌하게 풍자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문득 코앞으로 다가온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난히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 떠올랐다. 이미지가 우선이냐, 콘텐츠가 우선이냐는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놀라운 것은, 이제 이미지의 지배가 단지 영화나 드라마적 현상으로 국한하는 일이 아닌 ‘정치행위’라는, 얼핏 보면 전혀 무관해 보이는 부분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자각이다.

이미지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강물 같은 것이지만, 각종 이미지의 분무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미지는 더는 환(幻)이 아니다. 10대 골프소녀 미셸 위는 자신의 본업인 골프라는 ‘실체’를 통해 얻은 상금은 450만 원이었지만, 자신의 이미지라는 ‘현상’을 팔아 광고라는 형태로 챙긴 돈은 무려 3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미지란 게 무조건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당대를 풍미하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당대 사람들이 갈구하는 어떤 것, 혹은 결핍된 어떤 것을 채우는 욕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욕구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미지가 만들어진다고 할까. 그래서 이미지는 허망하다. 욕망이 허무한 것처럼 그것은 쉽게 부풀려지고 쉽게 허물어진다.

대중들은 실체가 아닌, 이미지에 속는다고 억울해 할 것이 없는 게 그들은 언제라도 이미지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작 실체가 아니라 환상을 살았던 것은 이미지에 현혹된 대중이 아니라 이미지의 대상이었던 당사자들이었다는 것은 그동안 숱하게 명멸해 온 스타(정치인도 예외는 아니다)들의 부침 많은 삶들이 확인해 준다. 그래서 ‘이미지 정치’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는 정치인 그 자신이 될 위험이 높다.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인터넷의 클릭 한 번으로 우리는 과거보다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현실 속에서 허구의 소설이 다시 영화라는 이미지로 탈바꿈했지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 상영을 반대하는 현상은 역으로 말하면, 현대인들은 더는 이미지를 환(幻)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교감하는 또 다른 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미래를 지배하려는 자여, 이미지를 지배하라.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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