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영화 인생에서 다섯 번째 형사 역을 맡은 ‘강적’(15세 이상) 시사회장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밤 강원 영월에서 밤늦게까지 촬영하느라 피곤하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은 밝았다. 그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의 차기작 ‘라디오 스타’에서 한물간 록 스타 역을 맡아 선배인 안성기와 투톱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22일 개봉되는 영화 ‘강적’에서는 후배 천정명과 함께 막장 인생을 연기했다. ‘강적’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탈옥하는 죄수(천정명)와 이혼, 경제적 무능에 아들의 투병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형사(박중훈)가 펼치는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형사와 범인이라는 직업적(?) 대척점에 서 있지만, 밑바닥 인생의 좌절과 상처가 두 사람의 내면을 하나로 묶는다. 선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다층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영화이지만, 전체적으로 산만한게 흠.
“아웃사이더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좋았다”는 그에게 ‘형사 역을 너무 자주 맡아 이제는 신선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직설을 던졌으나 싫은 내색도 없이 말했다.
“같은 형사라도 성격은 모두 달랐다. ‘투캅스’에서는 강력형사, ‘투캅스 2’에서는 부패형사, ‘아메리칸 드래곤’이라는 미국 B급영화에선 국제경찰,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깡패형사였다. 이번엔? 삶에 지친 형사다. 다시 말해 형사가 초점이 아니라 삶이 초점이다.”
‘늘 낙천적인 표정의 당신이 삶에 지친 형사라니 안 어울린다’고 했더니 이번엔 아예 인정해 버렸다.
“그래서 나도 힘들었다. (웃음) 편하게 사는 데 익숙해져서 생활에 지방이 많이 끼었는데 막장인생의 황폐한 삶을 연기하려니 안 맞는 옷을 입는 것 같아 처음엔 감정선 잡기가 힘들었다.”
그는 이제 배우 인생에서 어떤 강박 같은 것을 털어버린 것 같았다. 흥행에 성공하고 싶다든지, 인기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바람이야 여전하겠지만 그것에 휘둘리며 살지 않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관객들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고, 그것은 당연하다. 배우가 변신에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도 항상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난다.”
그는 재미있는 산수를 해 본적이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주연한 38편에서 영화 1편에 100신(scene) 중 80신가량을 찍었다면 그동안 얼추 3000신을 찍은 것이다. 한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모두 보여 준 셈이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항상 해야 하지만, 거기서 자유로워질 때도 됐다 싶다. ‘오래된 배우’는 신선미는 떨어지겠지만 안정감과 친숙함이 있지 않겠나. 요즘에는 박중훈이 연기한다는 생각보다 내가 맡은 역 그 자체가 그냥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인생관을 물었더니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홈런왕 베이비 루스는 홈런의 세 배에 달하는 삼진 아웃을 당했다고 하더라. 그 숱한 삼진아웃이 없었다면 홈런도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성공한 영화가 아니라 실패한 영화들에서였다. 실패가 너무 잦으면 아예 퇴출당할 우려가 있긴 하지만(웃음) 중요한 것은 오래, 지속적으로, 좌절하지 말고 이어가는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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