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비열한 거리’ 의상팀에 떨어졌던 특명이다. 조인성이 연기한 3류 조폭 ‘병두’(사진)는 가난한 집 가장인 데다 조직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인물. 뭘 입어도 그림이 되는 ‘패션 아이콘’ 조인성의 이미지는 ‘절대 불가’였다.
최근 유행에 민감한 남성들에겐 몸에 꼭 맞고 허리도 잘록 들어가는 가늘고 긴 라인의 정장이 대세. 하지만 조인성을 ‘덜 스타일리시’하게 만들기 위해 병두의 옷은 양복의 어깨선을 넓게 만들고 허리 라인도 일자로, 상의 기장도 좀 짧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헐렁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극중 황 회장(천호진)이 병두에게 “조폭같이 안 생겨서 좋다”고 말했듯 병두가 ‘조폭 같지 않은 조폭’이라는 뜻을 전달하려는 시도였다.
의상담당 김시진 실장은 “바지통이나 밑위, 상의 길이 등을 0.1cm까지 늘렸다 줄였다 했다”고 말했지만 이런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 속 ‘양복발’은 관객들에게 ‘멋지다’는 찬사를 받았다. 역시 키 크고 팔다리 길고 볼 일.
조폭 패션은 활동성과 ‘폼’을 겸비해야 한다. 김 실장은 “간지(일본어 ‘感じ’에서 나온 말로 ‘멋지다’는 속어로 통용)에 살고 간지에 죽는 게 그들의 모토”라고 말했다. 내려가면서 통이 좁아져 거의 발목에 붙는 일명 ‘당코바지’는 조폭 양복의 기본. 싸울 때 바지통이 펄럭이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는 집안 형편을 고려해 쥐색 정장 2벌로 버티다 조폭 형님을 죽일 때는 블랙 양복에 블랙 셔츠를 입었다. 이는 형님을 ‘봐버려야’(죽여야) 하는 어두운 마음과 피가 묻어도 표시가 안 나야 하는 실용성을 고려한 것. 후반부에 잘나갈 때는 양복의 통을 줄이고 광택 있는 소재로 세련된 스타일을 시도했다.
유하 감독은 “현실에 없는 옷은 영화에도 없다”며 리얼리티를 강조했다. 스태프는 실제 전직 조폭의 도움을 받았고 역세권 유흥업소를 돌며 조폭 패션을 관찰하고 조폭 인터넷 커뮤니티의 사진도 참고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의상은 캐릭터의 성격과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 그래서 관객들이 무심코 넘기는 조폭 의상 하나에도 제작진의 숨은 노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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