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12色의 ‘chic’

  • 입력 2006년 11월 2일 02시 57분


《‘시크(chic).’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혹은 ‘감각적이고 세련된’의 뜻을 가진 영어 형용사. 이 ‘시크’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10월 26일 개봉)가 나열하는 시각 이미지들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해 주는 단어다. 선머슴 같던 여성 앤드리아(앤 해서웨이)가 최고 명성을 자랑하는 패션 전문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비서로 발탁되면서 ‘시크’한 여성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를 담은 ‘악마는…’. 이 영화 속 장면 장면은 미국 뉴욕과 뉴요커들이 입김처럼 뿜어내는 도시적 감성의 최고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악마는…’에서 참을 수 없이 ‘시크’한 이미지들을 포착했다.》

① 독한 여자=편집장 미란다 역의 메릴 스트립(올해 그녀의 실제 나이는 57세다). 그녀는 섬세한 제스처와 표정을 구사해 세상에서 가장 콧대 높고 까다로운 미란다의 이미지를 만든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선글라스를 휙 벗으면서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는 그녀(사진1)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패션 행사장에 들어서는 그녀(사진2)의 얼굴 표정에선 귀찮음 5%, 신경질 20%, 잘난 체 30%, 자존감 20%, 프로페셔널리즘 20%, 그리고 성적(性的) 욕구불만이 5%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

명품을 휘감은 채 막 회사 문을 나서는 미란다(사진3). 그녀의 장딴지는 결코 슬림(slim·날씬한)하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신체와 매력에 대한 자기최면에 가까운 신념에 힘입어, 고탄력 스타킹을 뚫고 나올 듯한 장딴지의 기세가 오히려 매혹적이다. 독하고 교만한 중년여성이 섹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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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환상의 라인=△짝다리를 하고서 신경질적으로 잡지를 뒤적거리는 미란다(사진4)와 △창밖을 응시하며 앤드리아에게 갖은 트집을 잡는 순간의 미란다(사진5). 그녀의 보디라인은 얇거나 매끄럽지 않으면서도 기가 막힌 포즈가 빚어내는 양감(量感)을 통해 정중동(靜中動)의 리듬감을 발산한다. 인생이 속속들이 배어있는 중년여성의 도시적 보디라인. 또 미란다의 수석비서 에밀리가 잘난 체하며 전화를 받을 때 만들어내는 S라인(사진6의 오른쪽)은 도회적 ‘시크’함의 극치다.

③ 물화(物化)된 아름다움=촌티 팍팍 풍기던 앤드리아는 명품으로 무장하고 ‘시크’한 도시여성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지하철역에서 막 나오는 순간(사진7)과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덧칠하며 입을 헤벌리는 순간(사진8)의 그녀는 섹시하다기보다는 인성(人性)이 증발된 마네킹처럼 다가온다. 외모는 매력적으로 변했지만 정작 따뜻한 마음을 잃어 가는 그녀에 대한 시각적 암시. 특히 미란다의 지시 내용을 받아 적는 앤드리아(사진9)의 모습이 담긴 화면은 앤티크 스타일의 의자와 황금빛 꽃병과 같은 소품의 도움을 받아 정물화 같은 느낌을 던져준다.

④ 호모 섹슈얼의 감성=잡지사 런웨이의 수석 아트디렉터 나이젤. 앤드리아를 매력적으로 변신시키는 일등공신인 그는 영화에서 게이(동성애자)로 설정됐다(실제 뉴욕 패션계를 좌지우지하는 남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게이라고 한다). 나이젤 역의 스탠리 투치는 게이들의 행동으로 믿어지는 손가락의 섬세한 움직임을 통해 예술적 재능을 가진 게이의 ‘시크’한 면모를 표현한다. △오른손 중지에 하이힐 끈을 대롱대롱 매달아 앤드리아에게 내밀고(사진10) △오른손 약지를 살짝 구부린 채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동시에 힘을 뺀 왼손은 하늘하늘 공기 중에 날리며(사진11) △대화 중 왼손을 허리춤으로 슬쩍 올리는(사진12) 그의 주도면밀하게 고안된 제스처들은 게이의 예술적 감성과 센스를 짐작하도록 만든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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