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역할 위축된 시대상 반영
“엄마∼ 엄마∼.”
꾀병으로 병상에 누운 엄마(박원숙)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 남자. 피부과 전문의 주경우(윤상현)는 아무 죄도 없는 아내(박선영)에게 “뭐해, 우리 엄마 다 죽어간단 말이야. 가서 무릎 꿇고 빌어요. 엄마 화 푸는 건 그 방법밖에 없어”라고 사과를 종용한다. 그리고 엄마 앞에서는 세 살배기 꼬마처럼 속절없이 무너진다. “죄송해요. 노력할게요. 엄마, 이제부터 좋은 일만 있을 거야. 그래, 맞아 엄마.”
MBC 특별기획 드라마 ‘겨울새’(토·일 오후 9시 40분)의 한 장면.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박원숙과 윤상현의 모자 연기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드라마 전개에 코믹한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다.
○ 찌질하거나 질질 짜거나
참 ‘못난 남자’…. 허우대는 멀쩡한데 하는 짓은 ‘진상’이다. 찌질한 마마보이, 굴욕당하는 바람남, 질질 짜는 왕 등 요즘 드라마에 ‘못난 남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드라마의 감초역을 톡톡히 해내며 여느 주인공 못지않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바람을 피우고도 되레 뻔뻔하게 구는 남자들도 있다. SBS 드라마 ‘조강지처클럽’(토·일 오후 9시 55분)의 한원수(안내상)는 죄책감은커녕 “넌 여자도 아니야”라며 이혼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혼을 해 주지 않자 울며불며 사정한다. 그것도 모자라 바람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는 그는 이제 아줌마 시청자들의 ‘공공의 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SBS 드라마 ‘왕과 나’(월·화 오후 9시 55분)의 성종(고주원)은 걸핏하면 눈물을 참지 못한다. 소화와 처선 사이를 질투하는 그는 소화에게 “네가 사랑하는 정인은 누구냐”며 눈물을 흘린다. 시청자들에게는 ‘찌질 성종’ ‘울보 성종’으로 불리고 있다.
○ ‘못된’ 남자에서 ‘못난’ 남자로
요즘 ‘못난 남자’는 말 그대로 못 생긴 남자는 아니다. 일단 이들은 주연보다 나은 외모를 가졌다. 한국의 ‘기무라 다쿠야’로 불리며 데뷔한 윤상현은 전형적인 꽃미남. 고주원은 ‘얼짱’ 출신이다. 시청자 김숙애 씨는 “평범한 사람보다 잘생긴 남자가 연기하는 못난 모습이 더 주목을 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못난 남자’들의 등장을 남성의 사회적 역할이 위축된 시대 상황에서 찾는다. 드라마에서 그동안 그린 남성상이 △마초나 B형 남자 등 못된 남자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이상형에 국한됐다면 이제는 여성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남성의 모습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 얼마 전까지 B형 남자, 나쁜 남자 등이 드라마, 영화 소재로 활용되며 까칠하면서도 이기적인 남성 캐릭터가 각광을 받아 왔다.
낭만적 사랑을 그린 드라마가 줄줄이 실패하고 현실에 발붙인 드라마가 인기를 끈 것도 큰 요인이다. 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는 “‘쩐의 전쟁’의 박신양, ‘로비스트’의 송일국,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준기 등 올해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돈이나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해 현실에서 이전투구하는 인물들이 주를 이뤘다”며 “그러한 치열함이 아닌 사랑, 가정 등 이상적인 가치를 좇는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한가하고 비루하게 보이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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